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담마 Sep 01. 2022

잃어버린 문장을 찾아서

잃어버린 문장을 찾아서


도서관에서 글쓰기 관련 책을 훑다가 『작가 수업』을 발견했다. 그 책 표지엔 두 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하나는 헤밍웨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 하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느낌상 프랑스 작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두 사람 모두 그 순간 사진이 찍히는지도 모르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앞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구원으로서의 글쓰기』와 『작가의 시작』을 연이어 읽었는데, 두 책 모두 『작가 수업』을 언급하고 있었다. 두 책이 여러 번에 걸쳐 『작가 수업』을 인용하는 걸 보고, 나도 언젠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기대가 컸던 탓이었을까. 막상 읽어보니 몰입이 안 되었다. 저자는 서두에서 1930년대 미국에서 행해지던 글쓰기 교육을 비판하고 있었다. 당시엔 '작가는 타고나는 것이지 노력한다고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라는 식의 풍조가 만연했다고 한다. 나로선 그런 교육 분위기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눈이 뻑뻑하고 생각이 겉도는 독서였다.


그런데 1장이 끝나고 마지막 페이지에 커플링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장을 후루룩 넘겨보니 3장은 마크 트웨인, 4장은 존 골즈워디, 6장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하는 식으로 하나의 장(章)이 끝날 때마다 작가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사진들을 훑다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앞서 본 두 권의 책, 『구원으로서의 글쓰기』와 『작가의 시작』중 어느 하나에서 이 사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났다. 방금 후루룩 넘겨본 사진들 중 하나에 관한 설명이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한 작가의 자세와 표정을 세세하게 다룬 인상적인 글이었다.


둘 중 어느 책이었을까? 여러 작가 사진 중 어느 것을 묘사한 글이었을까?  기억은 불분명했지만, 그 글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분명했다. 


그때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며, 『작가 수업』에 실린 실제 사진과 이 글을 나란히 펼쳐놓고 대조해봐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구원으로서의 글쓰기,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 출판 민음사


기회가 왔으므로 책꽂이에서 두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우선 나탈리 골드버그의 『구원으로서의 글쓰기』 목차부터 살펴보았다. 목차만으론 사진을 묘사한 글이 어느 부분에 실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글이 대략 책 중후반쯤에 있었단 짐작만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았지만 허사였다.


작가의 시작, 저자 바버라 애버크롬비, 출판 책읽는수요일


약간의 오기가 발동했다. 연이어 『작가의 시작』을 뒤적였다. 이 책은 무려 365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과가 있다면 ‘268 예술적 혼수상태’가 『작가 수업』의 저자인 도러시아 브랜디에 할애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정도였다. 내가 '잃어버린 문장'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왜 책을 읽는가』의 저자인 샤를 단치도 이런 경험을 했다. 이 사람은 애서가이자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집안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한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고하며 “법대는 내게 최고의 학과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라고 회고할 만큼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컸다.


왜 책을 읽는가, 저자 샤를 단치, 출판 이루


어느 여름날 샤를 단치는 발자크의 책을 읽다가 ‘뉘앙스는 섬세함의 적이다’란 문구를 발견했다. 서점에서 일하며 포컷판 책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문장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덮은 다음 책장에 꽂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2분 후, 그리고 20일 내내 그 문장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이 사람은 발자크의 책들을 뒤지며 잃어버린 문장을 찾아 20년을 헤맸다. 그리고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왜 책을 읽는가』 34페이지에서 그는 당당히 밝히고 있다. 잃어버린 문장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그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는 평생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의 노력으로 만족한다. 펼쳐놓은 두 권의 책을 책꽂이에 도로 꽂았다.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 깨달음의 요지를 말하기에 앞서, 나는 미리보기가 가능한 발자크의 모든 책을 검색해보았다. ‘뉘앙스는 섬세함의 적이다’와 비슷한 내용의 문장은 발견하지 못했다.


샤를 단치도, 나도 애초에 찾아 헤맬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내 깨달음의 요지였다. 우리는 문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와 나는 우리가 읽었던 페이지의 텍스트에 기대어 스스로 문장을 창조한 것은 아닐까?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유일한 소유자이자 창조자로서 작가의 위상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글 쓰는 것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고와 감정들을 기록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기표를 기록하고 기의가 알아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록된 기표를 보며 우리 나름의 기의를 떠올렸고, 그 기의를 저자의 텍스트라 착각하고 찾아 헤맨 것은 아닐까? 눈으로 ‘가’를 읽고 머릿속으로 ‘나’를 창조한 셈인데,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죽고 독자가 탄생하는 순간이 아닐까?


이제 나의 관심은 우리가 왜 하필 독서의 그 순간에 그러한 ‘기의’를 떠올렸냐 하는 데로 옮겨갔다. 칼 융에 의하면 '실수는 무의식의 발로'다. 우리가 떠올린 기의는 우리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샤를 단치는 자신이 구사하는 문장에서 모호함을 걷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뉘앙스가 아닌 구체적인 섬세함으로 자신의 문체를 단련시키려 했던 건 아닐까? 평소 그러한 생각이 그와 유사한 내용의 발자크 글을 읽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유의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닐까?


내 경우 역시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평소의 무의식적 관념이 사진을 묘사한 그 글을 읽는 와중에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너무나 확연해 마치 책에 써있던 글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잃어버린 것이 없으므로 찾아 헤맬 것이 없었다.


버리는 글쓰기,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 출판 북뱅


나탈리 골드버그는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서 글쓰기를 선 수행과 결합시킨 인물이다. 그녀는 『버리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스승 카타기리 로쉬는 수업시간에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 65개의 찰나가 존재합니다.”
라고 말했다.


독서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한 문장을 읽는 사이에 숱한 찰나가 존재한다. 우리가 저자의 텍스트를 읽으며 스스로 문장을 창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우리의 무의식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도리어 그 문장을 나의 무의식과 대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작가 수업, 저자 도러시아 브랜디, 출판 공존







매거진의 이전글 글, 나를 비추는 거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