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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y 27. 2022

환희 지내라, 너를 좀 더 사랑해야겠다

안희연, <단어의 집>을 읽고

서점에 서서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고는 깨달아버렸다. 아, 나는 이 책을 집으로 데려가야만 한다. 아무리 책장이 미어터지고 있더라도 이북으로 이 책을 음미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겠구나. 세상에 툭, 툭 놓아져 있는 단어들에서 파닥임과 반짝임을 발견하는 시인의 마음이 맑고 아름다워 나도 그 생각 언저리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읽고 싶었다. 


"촛불을 가진 당신, 이리 가까이 오세요. 여기 실금 가득한 단어를 좀 보세요. 무언가 태어나려 하고 있어요." 

우리가 어떤 단어를 만난 순간 톡 하고 터져 오르는 새로운 의미들, 그리고 마음 변화에 대한 환한 기대를 품고 있는 말. 무언가 태어나려 하고 있다니요. 이토록 아름다운 생각을 어찌 저버리나요, 어찌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있나요? 


읽는 내내 새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알고 있던 단어들은 새롭고 풍부하게 다가왔고, 생경한 단어들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탁월한 비유와 조심스럽지만 눈부신 생각에 다다르는 말들이 적혀 있지? 시인의 생각을 따라다니고 싶었다. 어떤 단어들은 나에게 찰싹 붙어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 단어의 세계로 초대받곤 했다. 


'적산온도'라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 나와있는 시인의 모습이 나와 닮아 있었다. 조급함과 무기력이 동시에 이쪽저쪽으로 나를 압축시키는 바람에, 나의 세계도 마음도 아주 좁아졌던 때 이 글을 만났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쓰였다. "글에서 나의 온 생을 달리 볼 수 있는 힌트를 찾았다. 나를 향한 실망이 쌓여가고 있었는데, 몹시 잘 해내고 싶어서 또 곧 꽃을 피워내야 해서 온도를 쌓아가느라 그랬구나. 온도가 쌓일수록 버겁지만 머지않아 내가 피어날 것이라는 말이겠지. 나도 시인처럼 내게 말해본다. 희우야, 환희 지내라. 너를 좀 더 사랑해야겠다."


또 '밀코메다' 글에서 시인은 '없음의 있음'을 상상하고, 미래를 기쁘게 기다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간혹 불확실한 지금이 견디기 어려울 때 40억 년 후에 생길 밀코메다라는 은하를 떠올리며 마음이 기지개를 켜게 한다. 시인이 자신의 시집에서 옮긴 문장을 여기 적어둔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책에 밑줄을 긋고, 스티커를 붙이는 일은 중간에 그만두었다. 몇 번이고 이 문장들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단어 생활자가 되고 싶다. 순간을 살고 현재를 유영하고 다가오고야 말 순간을 기쁘게 기다려야지. 잘 살아보고 싶다,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책 속 문장들]

-왜 항상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온 걸까. 임계점은 한계가 아니라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 희연아, 환희 지내라. 희연아, 너는 너를 좀 더 사랑해야 하겠다.

-오늘의 나는 오늘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 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이 사랑, 이 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희우 작가의 프라이빗 에세이 연재는 '희우의 선명한 오후' 네이버 프리미엄 채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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