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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야 Feb 19. 2024

라그나로크의 끝에  

겨울비라고 쓰고 봄비라고 읽는, 비가 내리는 밤이다. 물론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르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도 있고 엊그제처럼 눈발이 날리기도 한다. 남쪽 지방에는 매화와 동백꽃이 피었다는데 아직 북쪽은 찬 기운이 역력하다. 그래도 2월이 되면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봄을 기대하며 일찍 찾아온 봄의 자투리를 꼭 찾아내고는 한다. 봄이 진짜 코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봄이 다가오는 작은 기척으로도 2월에는 봄을 느낄 수 있다. 


봄이 온다는 것은 

나무에 물이 올라 줄기가 초록빛으로 붉은빛으로 변하는 일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겨우내 땅 위를 덮고 있던 검불 속에서 작은 풀들이 고개를 내민다는 것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겨울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온갖 벌레들이 다시 주변을 서성이는 일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그러니까 

춥고, 삭막했던 겨울의 세상이 끝나간다는 것이다. 


<파멸할 운명의 신들의 싸움> 출처 위키피디

겨울의 끝, 봄의 초입. 이맘 때면 라그나로크가 떠오른다.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의 멸망, 아마겟돈의 날을 말한다. 전쟁, 자연재해, 물과 불 등 모든 것이 세상을 깡그리 부숴 삼켜버린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에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 죽음과 탄생, 끝과 시작은 신화에서 연결되어 있다. 풍요로운 신세계가 다시 생겨나고 살아남은 인간들에게서 다시금 생명은 꽃을 피운다. 


북유럽의 겨울은 혹독했을 것이다. 무척 길고 추웠으며, 북극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극야(밤이 계속되는 현상)는 일상이었을지 모른다. 불안은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 중 하나다. 자신이 언제 죽게 될지 아는 사형수는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안타까워하거나 큰 벌을 받게 된 일을 억울해하며 보내지만 형 집행일이 정해지지 않은 사형수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다. 불안은 그토록 강렬하고 위험하다. 죽음을 앞둔 이의 죽음을 재촉할 만큼 말이다. 극야의 추위가 언제 끝날지 모르던 시절, 사람들은 신들의 전쟁, 온 세상의 멸망을 연상할 만큼의 불안에 시달렸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있던 작은 나무의 줄기가 초록빛으로 변한다. 가지 중간중간에 붙어 있던 겨울 눈이 그새 몸을 부풀렸다. 해가 길어지고 볕이 따뜻해지면서 세상이 다시 환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를 터널이 끝난 순간처럼 봄은 그렇게 오는것이다. 


살다 보면 겨울 같은 시절이 온다. 몇 일이 될 수도 있고, 길면 몇 달,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그런 날들이 한두 번씩 오고야 만다. 그런 날에는 나를 둘러싼 괴로움이 너무 무겁고 화도 난다. 잠을 설치며 설핏 꾸는 꿈은 말도 안 되는 개꿈이기 일쑤다. 그래도 다행은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것처럼, 라그나로크 뒤에 다시 신세계가 펼쳐진 것처럼 또 새로운 날이 언젠가는 꼭 온다는 것이다. 오늘은 비 내리는 바깥세상도, 나의 마음도 어둡고 춥다. 이 비가 그치고나서 환하고 따뜻한 날들이 얼른 오면 좋겠다. 


세상의 봄은 계절에 맞게 천천히 오더라도

나의 봄날은 조금 더 서둘러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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