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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연 Feb 01. 2021

<혐오와 수치심> 2편

팬데믹 상황에서의 구분짓기에 대해

<수치심>

수치심은 자신이 완벽하길 기대하지만, 약하고 불충분하다는 판단을 내포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수치심의 특성을 저자는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져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수치심을 혐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적인 특징 중 하나로 보며 수치심은 유아 시절부터 생겨난다고 본다. 


이를 저자는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유아가 자신은 전지전능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서 벗어날 때 생겨나는 불안과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 사회적 가치 체계의 ‘정상적인’ 관점을 습득하기 전에, 수치심은 이미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수치심은 특정 사회가 지닌 규범적 성향에 상관없이 그 밑바탕에 존재하며, 인간이 지닌 인간성, 즉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감정이다. 


‘원초적 수치심’은 성인이 되어서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감정이며, 혐오의 감정과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의 수치심으로부터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을 ‘정상인’으로 규정짓고 다른 사람을 ‘비정상’으로 낙인찍으려는 행위를 일으킨다. 결국 저자는 수치심 역시 혐오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감정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타인과의 비교우위에 놓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상성을 회복하려는 행위를 낳기 때문에 법적 처벌 방식으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저자는 혐오와 수치심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에 대해서 독자에게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인간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혐오와 수치심은 이러한 사회가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감정 요소로서 저자는 이러한 감정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당부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전능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공적, 사적 측면에서 인간의 많은 불행을 초래해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회는 모든 개인의
평등한 존엄과 공통의 인간성에 내재된 취약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있는 사회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사회를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것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 하고,
우리의 법은 다름아닌 바로 그러한 사회의 법이라는 사실을
확신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다양한 형태로 혐오와 수치심의 감정을 표출하며 저자가 설명한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국내에서는 특히 집단감염의 발원지를 중심으로 구분 짓기 및 혐오 표현이 나타났다. 게이클럽에서의 집단 감염은 즉시 게이 집단에 대한 구분 짓기로 이어졌고 같은 맥락에서 종교인, 대구 거주자, 중국인 등에 대해 ‘비정상’의 낙인을 찍고 특정 집단을 배척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러한 혐오 표현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이라는 객관적 위험 요소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구분하기에 모호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분노 혹은 두려움의 감정은 세상 속에서 가질 수 있는 타당한 유형의 감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손상을 받는 것에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인간 생존을 위해 타당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혐오는 이와 대조적으로 관념적 사고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노와 다르게 비합리적이다. 때문에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위험 요소의 전파를 막기 위해 사회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단순히 혐오 표현으로 볼 수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앞서 든 예시들에 대해 혐오 표현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공중시설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비난을 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이해할 수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대중이 비난을 하는 부분은 한 개인의 행위에 대한 비난이지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게이 및 종교인에 대한 혐오 표현은 집단 감염의 위험을 간과한 개개인의 잘못을 집단 자체의 특성으로 확대하는 오류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혐오를 통해 구분짓기를 하고자 하던 잠재된 욕망이 코로나라는 객관적 위험 요소를 명분으로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국내에서 대두되었던 대부분의 혐오 표현들이 객관적 위험에 대한 분노와 구분짓기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뒤섞여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앞으로 생겨날 혐오 문제들에 대해서도 명확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게이, 종교인 등에 대한 혐오 표현이 분노와 혐오가 뒤섞인 표현이라면 오롯이 혐오 감정에 근거한 표현도 존재한다. ‘부머 리무버’가 바로 그것이다. ‘부머 리무버’는 베이비 붐 세대를 제거한다는 의미의 코로나19를 지칭하는 용어로 미국의 10-20대 사이에서 유행했다. 코로나19의 감염률은 젊은 층이 높더라도 사망률을 노년층에서 훨씬 높다. 이삼십 대는 치사율이 0.2% 이하이나 칠팔십대로 가면서 치사율이 20%를 넘는 특징으로 인해 젊은 층은 코로나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


 결국 ‘부머 리무버’는 바이러스에 대한 분노나 두려움의 감정이 거의 섞이지 않고 단순히 노년층에 대한 혐오가 드러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얘기했 듯 혐오는 자신이 갖는 동물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본성에서 나타는 감정으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연관돼있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은 실제로 죽음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교육을 통해 노인 집단에 대한 존중을 앞세우도록 학습했지만, 내재된 본성은 이렇게 불현듯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젊은층의 노년층에 대한 혐오는 굉장히 역설적이며 위험하다. 


혐오 속에 담긴 핵심적인 관념은 전염에 대한 사고다. 누군가 어떤 행위를 금지시키는 근거로 혐오를 제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전염되는 것을 막으려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인 혐오는 오히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한다.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이유로 코로나에 취약한 노인들과 자신을 구분짓고 코로나의 전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특히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코로나19로 인한 피로감이 젊은 세대로 하여금 인간의 존엄성을 잊고 의도하지 않은 노인 혐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머 리무버’가 이슈 되었을 때 많은 젊은층들 역시 비윤리적인 발상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의 피로감은 젊은층에게서 가장 먼저 드러났다.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회적 활동에 대한 욕구가 커지며 젊은층은 정부의 권고 조치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까지 사회적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학습된 인간의 존엄성이 개인의 피로감과 맞물려 조금씩 잊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부머 리무버’라는 단어에 분노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노인혐오를 하고 있다. 코로나는 이 시대에 인간 본성이 드러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팬데믹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5년 주기로 찾아오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끔찍한 일이지만 지금 사태를 바라본다면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치사율이 유독 높은 기관지질환 환자와 노년층에 대한 젊은층의 구분짓기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지 않을까?. 바이러스가 혐오의 명분이 될 수 없도록 팬데믹 상황의 세대간 감정 차이 문제를 보다 깊게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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