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동안, '일'에게 나를 내어주고 휴식을 내어주었다. 혼자서 '이번에 좀 잘했는데?'라며 으스대가며 일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믿고 따르는 상사는 내 작업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했고, 눈이 날카로운 상사는 심신이 지칠 때까지 노력해야 성장할까 말까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내 손에 든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잠깐 선 좀 넘겠습니다>는 이 결과를 마주하기 직전에 읽었다. 주말에 회사에 나갈 일이 있었던 나는 오랜만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었다. 그동안 일에 치인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종종 읽는 최원석 작가의 글은 힘듦을 지워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 선 좀 넘겠습니다>에 담긴 작가의 시선은 온화하다. 작가는 아니라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글자와 시선에는 온기가 있다. 누군가를 냉정하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슬픔이란 필터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려는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사건을 보는 시선을 조금만 틀어도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한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슬퍼졌다. SNS를 통해, 작가가 아버지와 이별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원석 작가는 아버지의 메시지에 짧게라도 답장하려는 노력과 손을 몇 번 더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출퇴근하면서 보는 SNS 게시물과 원고가 겹치며 마음이 시큰해졌다.
이 책을 읽으며 한번 뜨끔했던 적이 있다. 바로 '생겼거나 사라졌거나'의 한 대목에서다.
인스타그램에서 책을 나눠 주는 이벤트를 자주 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을 나눠 주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특별한 계기가 되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법. 그들이 내 마음과 같을 수만은 없어 속상할 때가 종종 있다.
-<생겼거나 사라졌거나> 중
미리 밝히지만, 최원석 작가님에게 선물을 받고 먹튀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다니는 곳에서 처음 낸 책을 홍보하기 위해, 작가님께 홍보를 부탁드렸었다. 작가님 덕분에 SNS에서 많은 독자들을 모았다. 이벤트가 끝난 다음, 한 가지를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낼까 말까에 대함이었다. SNS를 보고 연락을 했기에, 따로 선물을 보내면 너무 오지랖이 넓어 보일까 봐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음을 참았다. 그런데 '그들이 내 마음과 같을 수만은 없어'란 문구를 보자, '아! 그때 뭘 보낼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심지어 이 책의 부제가 '오지랖인 거 압니다만'이다. 오지랖을 부리지 못해 뜨끔했던 팬은 이렇게나마 내적 감사를 표시한다.
사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은 '마음을 쓰는 일'인데, 이 책의 마지막 꼭지여서 인용하지 않는다. 그게 책을 사서 보는 다른 독자들에 대한, 그리고 인세로 만수르가 되어야 할 작가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만 밝히자면,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얻느냐는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너도나도 여유가 없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을 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손에 든 풍선을 놓친 나를 관찰자적 시점으로 본다. 갑작스럽게 '펑' 하는 뻥튀기 기계 소리에 풍선을 놓쳤다고 하자. 그럼 나는 평생 '펑' 소리만 들어야 할까?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풍선만 아쉬워해야 할까? 내 마음이 닿아야 하는 곳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이미 지나간 일(물론 반성은 해야겠지만)에 마음을 쓰다가 속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게 바로 최원석 작가가 선을 넘어 나에게 다가온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