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설치 작업 <폴. 앤디. 바스룸>은 2차원 회화 작업에서 사용하는 원근법을 3차원으로 공간화한 작업이다. 회화에서는 3차원 현실을 2차원 평면에 재현할 때 원근법을 사용하는데, 작가는 이 원근법을 3차원 현실 공간에 직접 세웠다. 이 설치 작품은 갤러리 공간을 채운 화장실 공간으로 철제와 종이로 만든 걸린 옷과 욕조, 변기, 세면대, 거울이 있고, 변기 아래에는 실제 물병이 놓여 있다. 이들의 그림자는 입체감이 살아있게 채색되었다.
그동안 작가는 인간의 행동, 인식, 지각, 인지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를 바탕으로 일상과 실존의 문제를 반영하는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작업 등을 구현해왔다. 이번 작품 <폴. 앤디. 바스룸>에서는 2차원 기법이 3차원 공간으로 펼쳐질 때 중첩되고 왜곡되는 작업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접하는 우리 모습을 환유(換喩)한다.
우리는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술 세계 속에서 매체가 쏟아내는 이미지들에 정신을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미지는 현실보다 더 멋지고 환상적인 ‘실재(the real)’가 있을 듯이 다가오며, 어떤 특별한 재현적 표상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 이미지가 쏟아지는 시뮬라크르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기호는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고 사라진다. 허구가 늘어날수록 표상은 늘어나고 허구가 실재보다 더한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허구 세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한다.
이렇듯 기표와 기의가 뒤섞인 기호 속에서 우리는 때로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행동하고 말하며 살아간다. 현재 생각과 시점은 한 가지라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알아채지 못한 무의식과 문화적 영향 등 수많은 타자가 함께 들어가 있다. 온전한 나를 모르는 ‘나’들이 만나 소통하며 시점은 서로 중첩되고 왜곡된다. 우리는 원근법과 같은 세상 속을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기호와 허구를 내려놓고 가장 현실적인 존재, 실존하는 나를 만나는 곳은 화장실이다. 세면대 위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타인이 나를 볼 때 비칠 모습을 확인한다. 나를 보는 동시에 타인이 보는 나를 상상한다. 나와 마주하며 타인과 소통이 필요 없는 공간인 동시에 소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화장실 사물들 그림자는 뚜렷한 경계선을 보여준다.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현실에서 그림자는 경계가 모호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힘을 가진다. 선명한 그림자, 이는 허구를 벗고 실제로 존재하게 만드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폴. 앤디. 바스룸>은 우리 시각과 인식 ‘사이 공간’을 펼쳐놓은 듯하다.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은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본다. 보고 느낀 시각 정보는 뇌가 종합해 개념화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특정한 종류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에서 개념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보고 느낀 경험과 때로 일치하지 않거나 혼돈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전시회 동안 설치되고 사라지는 일시적(ephemeral)이며 소유할 수 없는 형태이다. 실제 작품으로 남지 않고 공간에 존재했었다는 기록만 남기며 기억 한편에 자리 잡게 된다. 기록과 사진으로 작품 공간을 떠올릴 때 남겨진 이미지와 인식하는 과정 사이에서 우리는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는 작업을 또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
폴 세잔은 원근법을 파괴하며 사과를 표현했고, 앤디 워홀은 원근법 없는 평면에 회화(원작)를 수없이 찍어내는 작업을 선택했다. 작가는 원근법을 사용해 3차원 공간에서 특정한 객체(specific object)를 구현했다. 이 공간에서 실제 모습이 어떻게 왜곡되고 중첩되는가를 펼쳐 보이며, 우리에게 어떻게 현실을 마주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재은 개인전 <폴. 앤디. 바스룸.>, 서울 성북구 사가 갤러리, 2022. 10.6~10.30 00시~24시 (휴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