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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Jul 29. 2022

플럭서스 리더 (The Fluxus Reader)

출처: The Fluxus Reader 켄 프리드먼  편저

플럭서스 리더(가제), 정유진 옮김, 갈무리 출판사, 출간예정       

       



플럭서스 포럼의 발달 : 초기 퍼포먼스와 출판 · 오웬 스미스  

      

저녁 8시,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예술평론가이자 미술관 관장 장 피에르 빌헬름의 사회로 <페스툼 플룩소룸 플럭서스>Festum Fluxorum Fluxus가 열렸다. 무대 앞에는 거대한 흰 종이가 스크린처럼 설치되었고, 빌헬름은 무대 왼편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준비한 대본을 읽었다.      


오늘 선언문을 발표해야만 할까요? 다다 예술가, 초현실주의자를 비롯한 일반인 개인이 표방했던 영웅시대 선언문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제 더는 소리만 지를 게 아니라 고민을 해야 해요!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겠죠! 그럼 정해진 방법이 있나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심오한 뜻을 품은 행위와 제스처를 만드십시오. … 이러한 행위와 제스처는 다다와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 이런 신예술운동을 ‘네오다다’라 하는데 이는 참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잘못된 용어입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도 번지고 있습니다. 작곡가이자 <조작된 피아노>의 창시자, 음악에 우연성이라는 요소를 불어넣은 인물인 존 케이지를 보십시오. … 어떤 의미에서 케이지는 명실공히 선구자입니다. 오늘 작품을 선보일 미국 젊은이는 조지 브레히트, 딕 히긴스, 라 몬테 영, 앨리슨 놀스, 조지 마키우나스 … 벤저민 패터슨, 테리 라일리, 에밋 윌리엄스입니다. 이들은 케이지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도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1]

벤자민 피터슨, <종이 조각>(1960), ‘네오 다다 뮤직 페스티벌’ 공연 무대, 뒤셀도르프, 1962년

           

빌헬름의 말이 끝나자 벤 패터슨의 <종이 조각>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무대 양쪽에서 두 퍼포머가 폭 8센티미터, 길이 38센티미터 정도 되는 큰 종이를 들고나와서 이 종이를 앞 좌석 관객들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동시에 무대 뒤에서 누군가 종이를 구기고 찢는 소리가 나면서, 무대 위에 설치된 종이 스크린에 작은 구멍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 구멍들 사이로 종잇조각과 종이 뭉치를 관객을 향해 뿌리자 무대 양쪽에 서 있던 두 퍼포머가 들고 있던 종이를 관객들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무대에 설치된 종이에 난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무대 뒤쪽에 서 있던 여러 퍼포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처음 종이를 들고 나왔던 두 퍼포머가 또다시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는데 이 종이에서 편지지 크기의 인쇄지가 관객에게 쏟아졌다. 인쇄지의 한 면에는 선언문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벤자민 피터슨, <종이 조각>(1960), Hypokriterion극장 공연 무대, 암스테르담, 1963년 6월 23일


“지성, 전문성, 상업화에 찌든 문화인 병든 부르주아 세계를 없애라. 죽은 예술, 모방 예술, 인위적 예술, 환영주의 예술, 수학적 예술이 판치는 세계를 없애라. ‘유럽주의’ 세계를 없애라! …  예술평론가, 예술애호가, 전문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유하도록 살아있는 예술, 반예술, 비예술적 현실을 널리 알려라. … ”[2]  


무대 위 설치된 종이 스크린이 갈기갈기 찢겨 종이 부스러기만 남으면서 <종이 조각> 퍼포먼스의 막이 내렸다.     


벤자민 피터슨, <종이 조각>(1960), ‘네오 다다 뮤직 페스티벌’ 공연 무대, 뒤셀도르프, 1962년

[중략]     


1963년 2월 2~3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열린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초창기 플럭서스 그룹의 발생 단계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62년 가을과 겨울에 비스바덴, 코펜하겐, 파리에서도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열렸고 뒤이어 1963년 봄과 여름에 암스테르담, 헤이그, 니스에서도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열렸다. 하지만 뒤셀도르프 페스티벌은 플럭서스를 ‘흥미로운 것들’을 퍼포먼스하는 장이라 생각했던 기존개념에서 이벤트에 기반한 퍼포먼스로 플럭서스를 완전히 바꿔놓았다.[3] 플럭서스에 일어난 이 같은 변화는 기존 플럭서스에서 모색되었던 다양한 퍼포먼스 방식을 전면 거부했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플럭서스 태도나 퍼포먼스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발전이 두드러졌다. 또한 이후 수십 년 동안 플럭서스 그룹의 철학 본성과 역사적 발전과정 형성에 계속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플럭서스와 컴퍼니[4] ·  켄 프리드먼          


플럭서스에 대한 논의는 종종 조지 마키우나스로 모아진다. 마키우나스의 역할이 계속 언급될 것임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조지 마키우나스는 다시없을 인물이며, 독창적인 장소에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가 플럭서스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1962년부터 1970년 초 사이에는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의 편집인이며 페스티벌 조직자였고, 때에 따라서 단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플럭서스가 성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역할이 중요해지자 자신의 중앙 집중적 지배력을 완화했다. 마키우나스에게는 플럭서스 모든 예술가에게 예술적 지령을 내리는 일보다 사회적 행위로서 ‘플럭시즘’을 전파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중략]


조지 마키우나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조직 전문가였고 체계적 사고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이 작업에 요구했던 수없이 많은 비체계적 방법 때문에 모든 사람과 다 편안하게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 중반 그의 작업 방법이 바뀌었으며 리더십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것이 플럭서스가 새로운 형식을 얻고 성장했던 방법이다.


마키우나스는 때때로 조언과 비평을 주었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플럭서스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고서야 편안해질 수 있었다. 이것이 플럭서스가 1970년대 영국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방법이었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새로운 플럭서스 예술가가 나타나고 그들이 아이디어와 활동을 생생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플럭서스가 4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다. [중략]


처음 플럭서스가 나타난 이래 오랜 시간이 지났다. 플럭서스는 나중에 나타난 플럭서스와 대체되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해왔다. 플럭서스 활동의 다양성은 우리 삶을 사로잡았고 역사에 귀중한 한 획을 그어주었다. 플럭서스가 한 사람에 의해 통제되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플럭서스는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들어왔고, 40년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고 다시 새롭게 재탄생하는 과정을 겪어 왔다.         

      





 곧 출간될 플럭서스 리더 소개 · 정유진

        


이 책은 오웬 스미스, 사이먼 앤더슨, 한나 히긴스, 이나 블롬, 데이비드 도리스, 크레이그 세이퍼, 에스테라 밀만, 스테판 포스터, 니콜라스 저브러그, 래리 밀러, 수잔 자로시, 딕 히긴스, 켄 프리드먼이 철학적, 역사적, 비판적, 예술적 입장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플럭서스를 다룬다.


1장은 오웬 스미스, 사이먼 앤더슨, 한나 히긴스가 1960년~1970년대 플럭서스를 서술한다. 스미스는 1962년부터 나타난 초기 플럭서스 페스티벌 퍼포먼스와 1960년대 서유럽, 미국에서의 플럭서스 설립 과정과 활동을 자세히 설명하고, 앤더슨은 1970년대 플럭서스가 어떻게 끊임없이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어 히긴스는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나타난 플럭서스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과 당시 비평가들이 어떻게 조지 마키우나스를 보았으며 평가했는지를, 그리고 플럭서스 논쟁에 관한 일도 언급한다.


2장은 이나 블롬, 데이비드 도리스, 크레이그 세이퍼가 각자의 시각으로 플럭서스를 논한다. 블롬은 존 케이지의 망각, 지루함에 관한 것을 히긴스가 어떻게 ‘위험’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해 나갔는가 말하고, 지루함을 이벤트, 공간, 축척, 소리/목소리 등의 개념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이어 도리스는 선종과 플럭서스 퍼포먼스를 연결 지어 분석하고, 세이퍼는 플럭서스는 예술운동이라기보다 다양한 실험적 접근 방식을 가진 사회적인 것이다라는 점을 논한다.


3장에서 에스테라 밀만은 다다를 설명 하면서 다다의 가장 직접적인 후계자 중 하나로서 플럭서스 정신이 어떤 맥락을 타파하고 넘어서려 했는가를 논한다. 또한 스테판 포스터는 플럭서스와 사물 체계와의 관계를 서술하며, 니콜라스 저브러그는 장 보드리야르 문장과 예술가 벤 보티에의 작품을 연결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4장은 래리 밀러가 조지 마키우나스를 인터뷰한 내용과 빌리 마키우나스가 수잔 자로시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다.


5장은 딕 히긴스와 켄 프리드먼의 글로, 히긴스는 플럭서스를 다다, 초현실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며, 플럭서스 작품의 평가 방법, 예술가, 대중, 협회가 수용하는 다른 측면들에 대해 논한다. 마지막으로 프리드먼은 1962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플럭서스가 변화됐는가를 요약하며 12가지 플럭서스 아이디어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




[1] Jean-Pierre Wilhelm, [untitled manuscript], Sept 1962, Archive Sohn, Staatsgalerie, Stuttgart. 이 글은 뒤셀도르프 플럭서스 축제에서 빌헬름이 읽은 정확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장 피에르 빌헬름은 초창기 플럭서스 퍼포먼스 공연의 소개 서문인 ‘Parallele auffuhrungen newster musik’를 썼지만, 이는 아마도 뒤셀도르프에서 읽었던 텍스트와 비슷할 것이다.

[2] George Maciunas, ‘Fluxus Manifesto’, nd [c1963], Archive Sohn, Staatsgalerie, Stuttgart.

[3] Dick Higgins, Postface/Jefferson’s Birthday, New York : Something Else Press, 1964. 딕 히긴스의 Postface 섹션에서 플럭서스 본래의 목적과 플럭서스가 관심을 두었던 많은 측면이 논의된다.

[4] 이 에세이는 원래 1989년 에밀리 허비(Emily Harvey)갤러리 전시 Fluxus and Company를 위해 쓰였다. 이후 개정판과 다양한 번역본으로 널리 재출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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