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를 들으며 나도 엄마가 되었다.
2021년 6월 1일 04시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 양수가 터진 지 4시간이 지났다. 마취과 선생님이 오셔서 무통주사가 준비되었고, 곧 촉진제도 투여된다고 했다. 무통 분만 시술을 받기 위해 왼쪽으로 돌아 누워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굽힌 무릎은 가슴까지 끌어당겨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짧아지는 진통에 베갯잇을 쥐어뜯던 중 마취과 선생님의 도착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다.
무통 분만을 위한 처치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오래'라는 표현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느낀 시간의 길이였다. 시술 중 움직임이 없어야 하기에 간호사 한 분은 진통으로 뒤틀리는 내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눌렀고, 내 등 뒤로는 시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계를 보기는커녕 웅크린 몸이 짓눌리고 있어 시야는 차단되었고, 나는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진통이 찾아올 때면 이를 악물고 '진통 왔어요'라고 알리며 간호사 분께 조금 더 세게 나를 눌러주기를 부탁해야 했다. 진통이 끝나면 '언제 끝나요, 아직도 멀었나요' 라며 졸음과 피로 속에 희미해지는 의식으로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번번이 똑같았다. "곧 끝나요." 나는 무통 천국이 아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통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안타깝게도 무통 효과가 잘 듣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2021년 6월 04시 30분
남편은 연락이 없었고 병원에선 보호자가 필요했다. 연락을 받은 엄마가 병원에 도착했고 출산까지 분만실에 함께 있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분만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이 들어올 수 있었고, 엄마의 도착은 남편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쉬움은 느낄 새도 없었다. 허리는 끊어질 것처럼 아팠고 배는 내장이 모두 뒤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진통이 2분 주기로 짧아졌을 때 엄마가 분만실에 들어왔고 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출산을 기다리며 진통과 출산 후기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두려움 반, 호기심이 반이었다. 누군가는 항문으로 수박이 나오는 기분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배 위로 트럭이 지나가는 느낌이라 했다. 분만실의 의사, 간호사, 담당 직원 분들이 힘주라는 대로 힘을 주면 금방 끝날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체에 힘을 주게 될 것이란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2021년 6월 새벽
진통 주기가 2분 이하로 떨어지면서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힘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주지 않으면 나도, 아기도 죽는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 시간에 나도 모르게 하반신에 온 힘이 들어갔다. 자꾸 힘이 들어간다는 나의 말에 분만실 침대 양 옆으로는 손잡이가 세워졌다. 곧이어 침대 위로 다리받침이 세팅되었고, 누군가 머리맡에 다가와 힘이 들어갈 때면 발을 받침대에 올리고 손잡이를 당기면서 천천히 열을 세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구였는지, 그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였는지, 여자 목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때부턴 내가 눈을 감았었는지, 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성의 끈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엄마는 침대 옆 손잡이를 당기며 부들거리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진통이 찾아올 때면 잇새로 '으-으-' 반복적인 신음소리 혹은 짐승 울음소리 비슷한 그것을 내며 힘을 주었는데, 분만실의 조명도 냄새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귓가에서 들리던 엄마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기억난다.
'제발 빨리 지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우리 딸이 잘 이겨내게 해주세요'
지금의 고통이 사라지는 방법은 오로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 출산 과정이 끝나는 것임을 알기에 삼십여 년 전 본인이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겪고 있는 딸을 보며,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뒤늦게 연락을 확인한 남편이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부천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2021년 6월 1일 아침
진통이 찾아오면 발을 더듬거려 다리받침에 발을 올린 채 힘을 주었고, 진통이 사그라들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에 빠졌다. 또다시 찾아온 진통이 끝나고 까무룩 잠이 들뻔한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산부인과 담당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이제 진짜 곧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이 임박하면서 분만실의 분위기는 마치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던 거실처럼 변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기와 산모를 응원했다. 새벽 한 시부터 진통과 힘주기가 반복되며 이제 정말 탈진할 것만 같았던 시간, 혹시 모를 응급 수술에 대비하기 위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있었던 시간의 끝에 '이제 정말 한 번만 더' 힘을 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 아까부터 계속 '한 번만 더', '진짜 금방'이라고 했다.
2021년 6월 1일 08시
분만실 밖에 남편이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분만실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새벽녘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아 솔직하게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뒤늦게 연락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초조하고 미안했을 남편을 알기에 그저 이따가 만나면 수고했다 안아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출산을 준비하고 시뮬레이션할 때, 마지막에는 극적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출산의 순간에 이번이 마지막 힘주기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힘주라'는 이야기가 들릴 때면 손잡이를 힘껏 당기며 온몸의 장기를 밀어낼 듯 힘을 줬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순간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느낀 이상하고 묘한 느낌이었지만 이제 끝났다, 아기가 나왔구나 알 수 있었다.
'6월 1일 8시 8분입니다.'
그 혼란한 중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몇 시간 만에 시간을 알 수 있었고, 곧이어 내 배 위로 꾸물거리는 뜨거운 생명체가 올려졌다. 내 아기와의 첫 만남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상상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응아-응아-' 떠나갈 듯 우는 아기 곁에서 간호사 선생님들은 분주하게 코와 입으로 양수를 빼내고 있었고, 어두운 조명에 처음에는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따뜻함보다는 조금 뜨거웠던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MBTI로는 ENTJ, 완벽한 플랜맨이자 N년차 패션 MD로 커리어를 쌓아오던 내게 계획과 스펙, 커리어가 통하지 않는 절대무적의 존재가 온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