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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어제 Jan 09. 2024

도망치고 싶은 날, 집으로 돌아올 힘을 줄게

외할머니의 쇠고기뭇국 레시피

 엄마가 취업준비를 하던 2015년 어느 봄날, 그해 마지막 하반기 공채 최종면접을 마치고 나온 엄마는 아무 계획 없이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어. 그리고 매표소 앞에 앉아 도시 이름을 쭉 훑어내리다가 '군산'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지. 바로 군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당일 숙박 가능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았어. 엄마가 그날 군산으로 떠난 이유는 그 터미널 전광판에 뜬 도시 이름 가운데 가장 낯설어서였어. 그날 엄마는 마음이 개운하면서도 무거웠고, 언제 어떻게 발표될지 모르는 결과가 무서워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잠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었거든. 소위 말하는 잠수를 타고 싶었어.

 그날의 군산은 엄마가 숨어있을 게스트 하우스 방 한 켠을 내어주었고, 맛있고 따뜻한 음식들로 속을 든든히 채워주었어. 군산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께 다음날 아침 식사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근처의 '쇠고기뭇국' 맛집을 알려주시는 거야. 그리고 엄마는 깜짝 놀랐어. 한참을 줄 서서 들어간 그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술 뜨는데 할머니가 끓여주던 뭇국 맛이랑 너무 똑같은 거야. 며칠 더 도망치고 방황하려던 마음을 접고 당장 할머니 집으로 출발했지. 결국 엄마를 위로해 준 건 낯선 곳, 조용한 여행지가 아니라 할머니의 맛이었어.


방황하던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낸 뭇국 레시피를 알려줄게.


 할머니는 국 끓일 때 꼭 한우 사태를 사용하셔. 사태는 기름기가 적은 대신 오래오래 끓여야 한대. 사태로 국을 끓일 때 충분히 끓이지 않으면 질길 수 있거든. 그래서 할머니는 아롱사태 큰 덩이를 사면 손질해서 한 번 국 끓일 양으로 소분해 냉동실에 보관하시는데, 할머니 냉장고 정리법도 나중에 알려줄게.

 사태와 무, 대파, 다진 마늘, 맛술, 국간장, 소금이면 군산 맛집이 부럽지 않은 쇠고기뭇국 재료 준비는 끝이야. 설마, 싶을 정도로 간단하지?

 쇠고기뭇국은 재료는 간단하지만 깨끗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맛이 충분히 우러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정성을 준비해야 해. 할머니는 사태의 기름과 근막을 모두 떼어내어 빨간 살코기만 남도록 손질하고, 무는 육수를 우려낼 큰 덩이의 무와 뭇국의 건더기로 먹기 위해 나박나박하게 썬 무로 나누어 준비해 두셨어.



할머니의 뭇국은 맑으면서도 구수한 맛이 나.

  할머니 말씀으로는 고기 핏물을 잘 빼야 한대. 물에 담가놓고, 키친타월에 두드려도 할머니가 끓여주던 쇠고기뭇국 맛이 나질 않아서 "핏물을 어떻게 빼야 맑은 국이 되는 거야?" 물으니 할머니는 고기를 한 번 끓인 물은 따라 버리신대. 엄마는 사실 육수가 아깝다는 생각에 고깃국물을 내면 푹 끓여내기만 했는데, 고기를 끓이며 올라오는 거품과 기름을 걷어내야 그 맛이 나오는 거였어. 요리는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 센 양념과 많은 재료들로 맛을 덮는 것은 쉽지만 덜어내고 빼면서 본연의 맛을 끌어내는 것은 항상 어려워. 한 번 끓여낸 국물을 덜어낸다 해도 그 후로도 오래오래 무와 함께 우려내면 덜어내도 더 깊어지는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이젠 핏물과 기름을 제거한 고기에 커다란 무, 대파, 물 그리고 맛술을 조금 넣고 끓여주는 거야. 할머니는 식사 준비를 하실 때 이렇게 국을 올려두고 끓이는 시간 동안 다른 반찬을 준비하시곤 해. 커다란 무의 테두리가 투명해지고 무가 물러질 때쯤이면 육수를 내기 위해 사용한 무와 대파를 꺼내고 나박나박 예쁘게 썰어둔 무를 넣고 다시 끓여줘. 할머니 말씀에 나박나박 썬 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끓이게 되면 무가 너무 물러져서 제맛이 나질 않는대.



 무를 넣고 다진 마늘을 넣어야 하는데, 국에 들어가는 다진 마늘은 김치랑 달라서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돼. 다진 마늘을 너무 많이 넣으면 국물에서 쓴 맛이 날 수 있거든. 그리고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해주는 거야. 국간장은 국물 색이 너무 짙어지지 않을 정도로 넣어줘. "얼마나 넣어요?"라는 질문 대신 요리하는 중간중간 맛을 보면서 네 맘에 쏙 드는 간을 찾아봐. 네 입맛이 계량스푼보다 정확하게 답해줄거야.




쇠고기뭇국의 화룡점정은 바로 여기야.


 할머니는 쇠고기뭇국, 사골국 같은 고깃국을 내어주실 때는 얇게 썬 대파와 통후추 그라인더를 식탁에 함께 올려주셔. 뜨끈한 국물에 올리는 생대파와 즉석에서 갈아 넣는 통후추가 아삭하고 깔끔하게 맛을 완성시킬거야. 이제 갓 지은 밥을 말아서 빨간 김장김치 척 올려 먹으면 추운 겨울날에도 속이 뜨끈해지지.



 아, 엄마는 그 최종 면접에서 합격했어. 그리고 한참 지나 할머니와 군산으로 여행을 갔어. 똑같은 식당에 들러 쇠고기뭇국을 시키고는 “나 그날 여기로 도망 왔었는데, 이 국을 먹자마자 엄마 생각이 났다 “고 가볍게 말했지. 수십 개의 이력서를 퇴짜 맞고 군산행 버스에 올라타던 20대 중반의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외로운 것 같았어. 사랑하는 네가 그런 날을 만나고 그런 기분을 느낄 거란 생각만으로도 엄마는 심장이 덜컥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날에 집으로 돌아올 힘을 네 안에 꼭꼭 채워줄게. 엄마에게 할머니의 쇠고기뭇국이 그랬던 것처럼 네가 자라나는 시간 동안 오래오래 뭉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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