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서른일곱의 김장 기록
네가 서른일곱이 되었을 때, 김치를 담가먹을까?
너의 할머니와 올해 김장을 담그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직은 고춧가루 하나만 발견해도 맵다며 질색하는 너이지만 크면서 자연스럽게 김치를 접하고, 먹게 되겠지. 한 30년 뒤, 네가 커서 가정을 이루거나 독립을 하게 되면 어떻게 김치를 먹으려나. 30년 전의 나도 이렇게 엄마와 마주 앉아 김장을 담글 미래는 생각도 못했으니 지금으로선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지.
아직 상상되지 않는 미래이지만 그래도 우리 집 김장 레시피는 나의 엄마에게서,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전해야 할 것 같아 기록하려 해. 올해는 절임배추 40kg(20kg 2박스)에 큼직한 배추 한 망(보통 3포기)을 담글 거야.
우리는 매년 같은 곳에서 절임배추를 사고 있어. 배추 절이는 일만 해결되어도 김장 반 이상은 하는 거라고, 너희 할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야. 절임배추를 살 때는 그냥 택배로 오는 것보다는 '냉장배송'이 되는지를 확인해 봐. 몇 년 전 택배로 절임배추를 받다가 제대로 절여지지 않은 배추가 상해서 오는 바람에 우리는 큰 낭패를 보기도 했었거든.
절임배추가 도착하면 박스의 위아래를 뒤집어줘. 아무리 잘 절여 오더라도 배송 오는 중에는 소금물이 아래로 몰려 있을 테니, 소금물이 전체적으로 고루 퍼질 수 있도록 해주는 거야. 한두 시간 정도 뒤집어 주었다면 넓은 채반에 올려 물기를 빼줘야 해.
배추에서 물이 빠지는 사이에 양념을 만드는 거야.
김장을 시작하기 전, 할머니의 레시피를 먼저 알려줄게.
하나, 양념 준비
- 고춧가루 (2~2.5kg), 설탕 약간, 마늘, 생강, 까나리액젓(또는 멸치액젓), 새우젓(은 선택사항), 소금
둘, 속재료 준비
- 무, 쪽파, 대파, 홍갓
셋, 육수 내기
- 3~4L를 우려낼 것. 황태 대가리, 가다랑어(또는 멸치), 무, 양파, 배, 파, 마늘, 생강, 말린 표고, 고추씨, 다시마
추신, 재료의 양은 각자의 취향껏. 고춧가루의 맵기라든가, 젓갈의 염도도 각자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할머니가 우리 아가한테 알려주는 김장 준비
- 하루 전날 김장 육수를 준비하기
- 육수에 찹쌀가루를 풀어 찹쌀풀 쑤기(다른 방법으로는 따로 풀을 쑤지 않고, 육수에 밥을 넣고 믹서에 간다. 이때 자투리 무가 있으면 같이 갈아준다.)
- 배추의 물기를 충분히 빼서 준비해 놓는다.
- 준비된 육수(찹쌀풀)에 양념재료, 속재료를 모두 넣고 버무린다. 간을 보고 싱거우면 소금을 추가로 넣어서 간을 맞추고 물기를 뺀 배추에 골고루 양념을 넣어서 겨우 내 밥상을 책임질 김장을 완성!
김장하는 날 우리 집의 아침은 항상 '왕-' 하는 믹서기 소리로 시작해. 할머니는 김장하기 전날 찰밥을 짓고, 육수를 우려내어 김장하는 당일 아침에 자투리 무를 넣고 한 번에 갈아주거든. 찹쌀풀을 쑤지 않는 할머니의 비법이지.
갈아둔 육수와 풀에 미리 다져놓은 마늘, 고춧가루, 새우젓(새우젓도 믹서에 갈 수 있지만 너무 많은 양을 갈지는 않아) 그리고 액젓과 소금으로 간을 하면 기본양념은 끝이야. 김장이라 하면 막막하고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하루 이틀 시간을 내어 미리 양념의 베이스를 준비한다면 못 할 것도 없어. 물론 엄마도 아직 혼자서는 자신 없지만.
김장하는 날의 할머니는 엄청난 마에스트로 같아.
"액젓 가져와봐. 여기 세 컵 넣을 거야."
"지금은 고춧가루."
할머니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하에 온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김장이 끝나거든.
완성된 기본양념에 무채와 홍갓을 넣고 버무리면 김치속도 완성이야. 할머니 손맛으로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듯 뒤집어 가면서 섞어주는 거야. 아직 엄마는 보조일 뿐.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채 썰기도, 계량도, 김치 속 넣기도 다 맡기지만 아직도 양념 섞는 건 넘볼 수 없는 영역이야. 네가 서른 일곱 즈음엔 엄마도 메인 셰프급의 실력을 갖추었을까?
지금부터는 중노동의 시작이야. 이제 절여진 배추 사이사이 김치 속을 넣어야 해. 자리에 앉아서 40kg 넘는 김치를 무치다 보면 정말 아랫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오거든. 엄마는 매해 김장하는 날 목표를 세워. '몸살 나지 않을 것. 나도, 엄마도.'
큰 대야에서 김치 속을 다 버무렸다면 지금부터는 엄마와 할머니가 각자 작은 대야에 배추와 김치 속을 옮겨 담아. 고갱이라고 하는 노랗고 작은 잎부터 양념하는 것이 아니라, 배추 속이 바닥으로 닿도록 뒤집고 위에 놓인 큰 잎부터 양념을 발라가면 조금 더 쉬울거야.
김치 양념을 바를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처음부터 양념을 넉넉하게 넣다가 마지막에 배추는 잔뜩 남고 김치 속은 없어 난감해지는 것 아닐까? 김치 양념을 초반에 너무 많이 넣지 않도록 조심해. 그리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김치의 색이 나도록 빨갛게 칠하려 하다 보면 너무 맵고 짠 김치가 되어 버릴 거야.'이렇게 드문 드문 빨개도 돼?' 할 정도로 양념을 발라주면 충분해.
김장할 때는 중간중간 꼭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해줘야 해. 그리고 김장이 끝나면 뜨끈하게 수육 삶아서 가족들과 나눠 먹고,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푹 자는 거야. 일 년 내 가족들이 먹을 김치를 만드는 일, 김장은 우리 집 곳간을 채우는 귀하고 즐거운 일이지만 절대 쉽지 않은 노동이기도 하거든. 아프지 않게, 탈 나지 않게 잘 마무리하는 것까지가 김장의 진짜 끝!
우리 아가는 언제 김치의 맛을 알게 될까?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김치 앞에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너이지만, 한해 한해 김장을 넘길 때마다 자라는 네가 우리 집의 김치 맛을 '우리 집의 맛'으로 기억할 수 있길 바라. 엄마는 하루하루 네게 집을 만들어 주는 중이야. 이후에 네가 커서 어디에서 누구와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 집에 널 기다리는 우리 가족이 있다는 걸 잊지 않도록.
우리 집 김치 진짜 맛있어. 언젠가일지 모르지만 네가 먹을 '우리 집 김치', 기대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