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를 찾아서②
시라타니운스이 협곡(白谷雲水峽)이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이라면, 그 주제와 아이디어는 조몬스기((縄文杉)로 가는 이 길에서 나왔다. 당초 미야노우라산은 '신' 그 자체라고 생각된 곳으로 인간이 가까이 가지 않았지만, 에도시대때부터 대대적인 벌목이 시작됐고 나무를 옮기기 위해 길을 닦았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구역에 들어가기 전까지 군데군데 나무로 만든 선로를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산'에 인간의 길을 만든 것. <모노노케 히메>의 주제의식(자연과 문명의 대립) 밑그림이다.
이날은 가이드 할아버지와 나, 와카야마에서 온 대학생 야마오카 미호 셋이 산을 올랐다. 새벽 4시15분에 만나 약 한 시간동안 차를 타면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엔 등산을 준비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비처럼 흩날리는 새벽이슬에 대비해 우비를 입은 이들은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오니기리 도시락을 까먹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준비운동까지 끝내면 5시 반에 출발. 바로 장장 10시간 산행의 시작이다.
처음은 좋았다. 한 시간쯤 지나니 동이 터 어둠은 사라졌다. 새벽녘의 산길은 상쾌했다. 선로를 따라가는 편한 길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약 2시간의 선로가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자 슬슬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왜 여기 오려고 했더라? 처음 야쿠시마에 가겠다고 하자 료코 씨는 "산에게 불려졌을지도?" 라는 낭만적인 말을 해주었는데, 산을 타는 내내 '인간은 왜 산을 오르고 산은 왜 나같은 하체부실을 부른거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10시간동안 가랑비 보슬비 이슬비 폭우까지 골고루 만나고 나니 나중엔 저런 생각조차 사치스러웠다.
약 6시간 걸려서 조몬스기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수령이 3000년을 넘어간다는 삼나무 앞에서 사람들은 기도를 하거나, 신령한 나무의 기를 받겠다며 손을 뻗었다. 나도 기도를 했다. 그때 한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세례를 받은 자연 앞에서 느낀 경건함은 나를 소박하게 만들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내려가는 게 일이라. 다시는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투어는 신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는 10시간 등산같은 것도 하지 않겠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비오는 산을 내려가는 길에 몇번이나 미끄러지고 흙바닥을 기면서 '아 이대로 퇴사하나… 이렇게 퇴사하게 될 거라곤 생각안해봤는데… 가방에 여권이 있으니 신원확인은 빠르겠지… 서른한살 후회는 없나…' 등 오버를 했으나 별일 없이 무사귀환했다. 막상 다 내려오니 상쾌하고 뿌듯해서 순간 놀랐다. 인간은 나쁜 기억을 까먹어서 산을 타는 거구나. 진짜 긍정적인 종족이구나, 라는 깨달음.
미야노우라산의 삼나무는 뿌리가 모두 밖에 드러나 있다. 앞서 말했듯 산 전체가 큰 화강암이고, 그 위에 두텁게 덮힌 이끼에서 나무며 풀이 자라났기 때문에 바위에 파고들지 못한 뿌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가이드 할아버지는 이끼 위에 싹튼 손가락 한마디만한 풀을 보여주며 "이게 삼나무의 싹이다"라고 했다. 그게 십년 간 자란 거란다. 그래서 우리가 본 대부분의 나무는 수령이 1000~3000년을 오간다. 흙이 없어 영양분이 부족하니 나무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자란다. 섬 밖에선 아쿠시마의 울창한 산과 높은 나무들을 보며 '야쿠시마는 비가 많이 오고 사람도 적으니 나무가 크게 자란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진짜 어려운 환경에서 겨우겨우 뿌리내려 커온 거랬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삼나무 싹을 밟거나 무심히 치워버리지만, 사실 그건 '십년의 성장'이라는 말이 조금 찡했다. "이 곳 숲은 시간이 키운 거네요!"라고 맞장구치자 가이드 할아버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키운 숲, 이라는 말이 내심 맘에 들어서 나도 웃었다. 산을 오르는데 10시간이나 걸렸다며 죽네, 사네 별말을 다했지만 시간이 키운 숲을 둘러보려면 응당 그에 걸맞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