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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Sep 06. 2024

천사가 된 여행, 천사를 만난 여행

     

   세상에는 많은 여행이 있다. 선남선녀들의 신혼여행, 돈도 시간도 알뜰살뜰 쪼개어 떠나지만 더없이 행복한 우리 가난한 이웃들의 가족 여행, 현실적 여건에 무릎 꿇은 연인들의 마지막 이별 여행,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꿈꾸기만 하고 끝끝내 불발된 사랑 여행, 단원고 예쁜 천사들의 하늘나라행 수학여행 등.      

 나도 내 인생에 아름다운 여행을 몇 차례 한 적이 있으나, 정유년 새해 남도 여행은 그 이전의 어떤 여행과도 격이 다른 여행이었다. 두 발로 걷고 또 렌터카로 달리는 여행이었으나 나는 천사로 불리었다. 

 천사!

 감히 입에 올리기도 미안할 정도로 경건한 호칭, 천사.     

 나와 나의 일행들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정규연 선생님이시다. 옛날처럼 궁벽한 곳이라 할 수는 없으나 서울에서는 네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살고 계셔서, 가고자 하는 마음 있어도 쉽게 갈 수 없고, 오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 있어도 쉽게 부를 수 없어서 언제나 벗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계신다.      

  전북 순창군 복흥면 지선리. 내 젊은 날 함께 근무했던 박문주 선생님의 가족 주소이다. 아픈 두 아들 때문에 약 10년 전부터 남편인 정선생님은 서울에서의 교사 생활 20 년 만에 명퇴를 하시고, 주변 인가에서 좀 떨어진 이곳의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박선생님의 근무지도 서울에서 광주로 옮겼다. 특수학교를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두 아들은 오롯이 아빠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루하루 지낸다.

 내 자식의 아픔이 치료된다면 내 살을 도려내고 내 뼈를 갈아 내는 아픔을 주저없이 선택했으리라. 내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러 내 자식들이 이런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나 하는 절망감에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소리없이 울었을까, 이 아름다운 부부가.


 이런저런 일로 남도를 갈 일이 있으면 나는 일부러 그 댁을 방문한다. 그 댁이 위치한 곳이 마침 복분자 산지여서, 좋은 열매로 담근 잘 익은 복분자주를 시음하는 기쁨은 덤으로 누린다. 그동안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일을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어느덧 이곳의 자연처럼, 이 댁의 부부처럼 순정한 상태로 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일행 9명은 2016년의 일상을 마무리하는 여행을 계획했다. 삶의 넓이와 깊이는 각각 다를지언정, 같은 일터에서 울고 웃고 분노했던 기억이 너무 소중하여 2박3일의 짧은 시간이나마 공감대를 더 단단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우리는 남녀의 차이, 노소의 차이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 없이 풍성하였으므로 그 여행지가 어디이든 상관이 없으나, 따뜻한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 우리처럼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곳을 물색하다가 통영, 장사도가 낙점되었고, 가는 길에 정선생님댁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정선생님 댁의 너른 마당에서 복분자주를 곁들인 점심을 대접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새해에 찾아온 첫 번째 천사들”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천사의 눈에 천사가 보인 것일까? 그동안 내 욕심에만 충실했던 일, 괜스레 사람들을 미워했던 일에 부끄러워진다. 이렇듯 사람을 환대하시는 이 부부를 좀더 자주 찾아오지 않았던 나의 나태함도 반성한다. 

 인근에 있는 백양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정선생님은 앞에 지나가는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의 입장료를 내어 줌으로써 모두가 천사가 되는 방법을 다시 가르쳐 주셨다.      

  통영은 신선한 해산물이 넘쳐났다. 전세계적인 불황의 그림자가 통영에는 그리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안도했다. 집값 비싼 서울에서 다들 자기만의 공간을 지니고 사는 우리 일행이지만, 2박 정도는 한 방에 대여섯 명이 복작거리고 자는 것을 감내하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들, 아니 천사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몸을 희생함으로써 즐거운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과 노닥거림으로써 즐거운 사람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 모임이다. 건강과 환경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자기가 아는 한도에서의 생활 수칙을 빈틈없이 실천함으로써 지성인임을 확인하는 사람과, 자본의 논리에는 가끔씩만 대항하면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 일행이다.     

 남도에 와서 배를 타지 않는다면, 배를 타고 바닷바람을 볼에 느끼지 않는다면, 배를 타고 새우깡 받아먹는 갈매기를 만나지 않는다면, 진정한 남도여행이 아니리라. 왕복 한 시간 남짓의 장사도 뱃길은 우리에게 이런 경험을 넉넉히 안겨 주었다.  

 비싼 뱃삯과 입장료를 감수하면서도 많은 관광객들이 이 엄동설한에도 장사도를 찾고 있었다. <별에서 온 그대>, <따뜻한 말 한 마디> 등 국내외의 많은 시청자들 가슴을 아련하게 한 것에 이 장사도의 경관이 큰 몫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사도가 남도 여행지로 손색이 없지만 순수함을 추구하는 우리 일행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는 2% 부족함이 있었다. 장사도를 소개팅에 나가기 위해 예쁘게 화장한 여인에 비유한다면, 여수 앞 금오도는 편안한 내 집에 있을 때의 화장기 없이 평안한 민얼굴의 여인에 비유할 만하다.


  우리 일행 중 다섯 명이 작년에 찾았던 금오도, 에메랄드 빛깔의 바닷물이 비렁길을 끊임없이 철썩이던 금오도, 상세하지 않은 안내도 덕분에 현지의 주민과 더 많은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금오도.      

 그 해의 금오도 여행에서 우리는 천사를 만났다. 여수에서도 배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고 자연경관을 즐기는 것도 여러 형태의 비탈길, 비렁길 1, 2, 3, 4, 5코스를 걷는 수준에 불과하여 돈 자랑하는 여행객은 볼 수 없는 섬. 

 밋밋한 인생이 없듯이 금오도에는 밋밋한 길이 없었다. 오르고 내리는 길이 좁고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고 미끄러워도, 내가 살아서 발로 딛고 걸어갈 수 있음에 오로지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길의 연속. 가끔 안정감이 찾아오면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일행 중 한 명이라도 탈이 나지 않을까, 내 몸처럼 걱정을 하게 하는 섬, 금오도 비렁길.


 낙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잠깐 들른 곳, 그곳에 천사가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한번 다녀온 후,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여인. 60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가진 여인. 금오도 비렁길 3코스 끄트머리에 내 집 주방보다 결코 크지 않은, 낡은 건물의 한 귀퉁이 카페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팔면서 관광객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있는 여인. 막걸리에 파전 한 판을 주문하고 허겁지겁 먹는 우리에게 남은 재료라며 한 판을 더 해 주는 여인. 금오도에서 수확한 금오도를 닮은, 아니 자신을 닮은 상품성이 없는 홍시감까지 넉넉히 서비스하는 여인. 열심히 먹고 있는 우리에게 낙조 시간이라며 갑자기 가게 문을 닫고 우리를 낙조 전망대로 안내하는 여인.

  시리게 푸른 바다와 하늘, 선혈 빛의 동백꽃이 지천인 금오도가 이 여인을 천사로 만들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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