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보다 무서운 손녀?
6살짜리 손녀의 외부 일정에 3시간 보호자 역할을 해 줄 수 있겠느냐는 딸의 제안을 받았다. 즉석에서 수락 답변을 했으나 야금야금 걱정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옷은 뭘 입고 가며, 젊은 엄마들에 비하여 내 손녀가 기죽지 않을 만큼의 겉모습을 갖추어야 할 텐데 어떡하나?
일단 염색을 하고, 가장 예쁜 원피스를 손질하고, 여름내 멀리했던 화장품도 다 찾아 점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메이크업에서 힌트를 얻어 사두었던 속눈썹을 꺼내어 미리 붙이는 연습까지 마쳤다.
일정이 끝나면 손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는 것까지가 당일의 미션이었지만, 아무래도 손녀와 딸, 사위에게 밥을 한 끼 먹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달콤 짭조름한 수육도 만들고, 두부조림, 콩나물오징어무침을 내가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로, 가장 맛있게, 가장 건강한 음식으로 1박 2일에 걸쳐서 만들었다. 손녀가 좋아하는 배추김치도, 그리고 냉장고 속의 오이김치, 파김치까지 오밀조밀 작은 용기에 담아서 배낭에 넣었다.
음식의 양을 많이 해서 주고 싶지만, 내 음식이 냉장고 속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것이 싫어서 딱 한번 먹을 만큼씩만 담았다. 그래도 배낭은 무게가 제법 나갔다. 내 차로 가면 시간도 줄이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운전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만약의 사태가, 손녀와 딸과 사위의 일정에 차질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작정해 두었다.
드디어 출발한다. 일단 버스를 타고 한숨을 돌리면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꼭 30년 전, 내 딸의 유치원 행사에서 친정어머니까지 3대가 함께한 일이 생각났다. 친정어머니도 이렇게 버스를 타고 시간에 맞추어 손녀의 유치원 행사에 오셨겠구나. 나는 그래도 직장생활을 오래 해서 예쁜 옷도 몇 벌은 갖추어 놓고 있지만, 내 어머니는 그렇지 못하여 상심하셨겠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30년 전 그때 3대가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상으로 벽걸이 시계를 받았다. 그날의 여섯 살짜리 손녀는 자라서 다시 예쁜 딸을 낳아 기르고 있고, 나는 아직도 내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살고 있으며, 그날의 시계는 지금도 우리 집 벽에서 건강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날의 어머니만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조손이 상봉하여 행사 장소까지 걸어가는 것도, 행사 중 손녀를 지켜보는 것도 다른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손녀네 집에 데리고 오는 것도 차질 없이 수행한 후, 따끈하게 밥을 지어서 손녀에게 먹였다. 수육 고기는 손으로 얇은 막을 벗겨 가면서, 두부는 짭조름한 게 맛있다고 하면서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 주어서 어찌나 예쁘고 고맙고 행복하든지,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2025. 0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