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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우 Jul 28. 2021

단테 신곡_지옥 편(1)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내세란 없다고 굳게 믿거나 현세를 살기도 골치 아픈데 그 다음까지 어떻게 생각하냐는 태도여서 내 안에 종교적 세계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곁에서 가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를 보면 마음의 평화는 있겠거니 했지만 그것조차 개인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가끔 흔들린다. 신을 영접하는 나의 회심 여부와 상관없이 저승의 지옥은 꼭 있어 주어서, 살아서 큰 죄를 저지른 자는 죽어서도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따져 보는 게다.     



제주도에서 너무 끔찍하고 슬픈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연정을 나누던 여인이 떠난 것에 앙심을 품은 한 남성이 그녀의 중학생 아들을 살해했다. 평소 착실했다는 아이는 일상에서 이어지는 살인자의 폭력에 몇 번씩이나 가출을 할 만큼 괴롭힘을 당하다 마치 처형당하듯 죽어갔다고 한다. 몸서리쳐질 일이다. 이웃도 오열하고 온 국민이 경악했다. 살인자에게는 법이 정하는 최고형도 모자랄 일이다. 모자란다면 그 다음은 어딘가. 바로 죽어서도 지옥행이어야 하지 않겠나. 1300년 단테가 떠난 ‘지옥 여행’에 따르자면 그 살인자는 지옥의 ‘7원’ 어디쯤인가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



△ 스틱스강을 배 타고 건너가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822년, 유화, 루브르박물관


    

지옥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모두 아홉 가지 죄의 고리(원)를 만나는데 각 고리는 여러 구렁으로 이어져 나선형을 이룬다. 처음 만나는 지옥의 고리는 림보다. 단테는 예수를 섬기지 않는 이단자도 끔찍한 지옥행에 두고 묘사하나, 예수 탄생  이전의 성현들(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과 어려서 미처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는 지옥의 초입에서 그 죄를 가볍게 묻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옥의 고통도는 상승한다. 애욕의 죄를 처벌하는 2원에서는 죄인들이 회초리 세례를 받으며 영혼이 허물어진 벼랑 끝으로 한없이 떨어지고 있다. 로마인의 자존에 상처를 준 클레오파트라의 비명도 이쯤에서 들려온다. 탐욕을 부린 자들을 가둔 3원과 반대로 인색함의 죄를 묻는 4원을 따라 분노의 지옥인 5원이 이어지고 있다. 이단자의 죄를 처벌하는 6원에서는 이승에서 보다시피 화형이 난무한다. 그리고 드디어 보인다. 폭력의 지옥인 7원.


    

무시무시한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반인반우)와 켄타우로스(반인반마)가 길길이 날뛰며 이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가까이는 끓는 피가 흥건한 계곡이 보인다. 폭력으로 사람을 해친 만큼의 피 값을 받아내려는 심산이다. 아니나 다를까 펄펄 달아오른 강물이 그 자들을 푹 삶고 있다.



이때 지옥의 순례자 단테는 울부짖는다.



“아, 눈먼 탐욕이여! 어리석은 분노여!
짧은 인생 동안 그렇게 우리 뒤를 쫓아다니더니
영원한 삶에서는 이런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구나!“
(p119_12곡 49-51) 





만일 단테가 순례를 통해 본 지옥이 실재한다면 제주의 그 악마도 아마 폭력의 지옥에 떨어져 두고두고 고통을 당해야 마땅할 테다. 이처럼 7원의 구렁들에서는 살인자와 폭력배, 도둑과 모리배 같은 흉악범들을 두루 만난다. 그렇다면 지옥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9원은 7원의 살인보다 더 중한 죄를 다스리고 있을 게 분명한데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단테는 이를 배신으로 판단했다. 혈족을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린 자들이 가장 혹독한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피렌체에서 파란만장한 활동을 이어가던 단테는 행정 장관에 오를 만큼 명예를 누리다 정쟁에서 밀려 추방된다. 그러면서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맞는데 그때 나온 글이 신곡이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
(p7_1곡 1~3) 



'죽음도 그보다 덜 쓸 테지만,
거기서 찾았던 선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보아둔 다른 것들도 말하려 한다‘
(p7_ 1곡 7~9)

  


단테의 신곡은 지옥 편을 시작으로 연옥 편과 천국 편으로 이어진다. 이제 겨우 지옥만 보게 된 내 눈에는 삶이 온통 지옥처럼만 보인다. 내 삶도 돌아보건대 아마 나중에는 지옥의 어느 구렁에 놓이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서 신곡의 다음 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쓴 것도 단 것도 모두 목격한 그가 마지막 순례를 마칠 때쯤이면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논하게 될지. 실수투성이 나의 삶도 진정 어디쯤에서는 치유 받을 길이 있지 않을지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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