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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우 Sep 09. 2021

에픽테토스_인생을 바라보는 지혜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부르신다.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거다. 나는 순간적으로 요 며칠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봤다. 혹시나 내가 섭섭하게 한 일은 없는지, 지난 아버지 제사 때 드린 제수비 봉투가 좀 얇지는 않았는지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성격의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혹시?

긴가민가 하는 내게 폭탄선언을 할 것 같은 비장한 얼굴로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그것도 평소보다 두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매우 좋지 않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얼마 전 단골 철학관에 들러서 봤다는 나의 신수 이야기를 하셨다. 특히나 올해는 '날 삼재'라 더욱 조심해야 한단다. 구설수는 당연하고 건강도 위험해지니 이 위기를 잘 넘겨야 한다고.



이런 이야기는 끝맺음의 낱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그 도사 선생께서 어떤 처방을 내렸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멘트가 어떻게 나올지 싶어 귀를 쫑긋거렸다. 다행히 굿을 하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다. 낡아서 안 입는 속옷을 속히 불태워야 한다는 언급도 없었다. 다만 값싸고 흔하게 써 온 부적 이야기도 없는 게 좀 이상했는데 도사가 말하기를, 올해 남은 몇 달만 잘 보내면 다음 해에는 일이 술술 풀리고 돈이 들어오며 아이들 걱정도 줄어든다는 게다. 그래, 올해 남은 몇 달만 잘 보내면 신수가 점점 훤해진다니 불행 중 다행 아닌가.



그런데 사실 내게는 이 몇 달을 잘 보낼 자신보다 어떻게 이겨낼지 무거운 심정이 더 크다. 지금 나는 구설수에 올라 있다. 생각지 않던 환경과 난제에 직면한 공동체에서, 회피하는 게 도리가 아니다 싶어 감투를 썼으나 여러 오해가 빚어져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다. 흩어진 사실의 파편을 모아 진실의 퍼즐을 완성해도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감정의 생채기를 보듬기가 여의치 않다. 그 도사 선생의 말처럼 진정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이럴 때 찾은 책이 에픽테토스의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다.



내 권한 밖에 있는 것들을 바라지 말라
p17



에픽테토스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다. 그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모든 외부의 시련에 대해 시련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내 권한 밖 일의 미래를 섣불리 기대하지 말며 오로지 내 권한 안의 진정에 가닿아야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내 권한 밖에 있는 것을 바라고 있다면 필히 불행해진다.



우리를 몹시 괴롭히는 것도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된다.




장애에 부딪히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그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 더 정확히 말해 자신의 생각으로 돌려야 한다. 무지몽매한 사람은 제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늘 남 탓만 한다. 하지만 깨우치기 시작한 사람은 자신을 탓한다. 깨우친 사람은 자신도 남도 탓하지 않는다.

p29



사실 내가 괴로웠을 적은 문제 해결이 더딘 책임을 자아에게나 혹은 타자에게 편중되게 전가했을 때였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권한 안팎의 도리를 잘 구분 지어 나아가고 있는지 되묻는다면 참 모자란다는 느낌이다.



에픽테토스의 인생 조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타고 온 배를 떠나지 말라면서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구분하는 것과 일의 경중을 가리는 일이 가장 상식적인 지혜라고 가르친다.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릴 것도 주문한다. 그렇게 하면 신의 만찬에도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척점에 있었던 만큼 절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에픽테토스와 같은 인생 철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성적 지혜라고 입 모은다.



물론 이 조언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저절로 해소할 리는 없다. 다만 가빴던 발걸음과 속 타는 심장의 파동을 잠시 멈추고 긴 숨을 한번 내쉬어 보게 된다. 멀리 내다보며 나의 행위들 가운데 행여 내 권한 밖의 것은 없었는지도 돌아본다.



△ 제임스 스톡데일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다.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 전쟁 당시 군용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포로로 7년 간 갇혀 있던 미 해군 고위 장교였다. 같이 붙잡힌 다른 포로들 가운데 막연한 희망을 품은 낙관주의자들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갔던 반면 강인한 냉정을 지킨 스톡데일은 끝까지 살아남아 석방되었다. 그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에픽테토스다.



사는 일에 꼭 정답이 있으랴 마는 진정한 자유는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그의 말에 내일의 용기를 얻고 싶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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