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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재를 인식한 자의 고통 : 구토가 쏠려온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by 책 읽는 호랭이



나는 존재하고, 나는 그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역겨운 일이다.



이따금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세계에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해 물음을 던졌을 때, 더 나아가 내가 앉아 있는 의자와 책상이 가진 존재를 파고들 때가 그 순간들이다. 우리는 항상 의식이 있지만 매 순간 의식적이지는 않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인식하려면, 일상의 무심한 상태를 깨뜨리고 의식을 칼날을 들이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하는 순간, 더 나아가 그 노력이 특정 사물의 존재를 파고드는 순간 구토는 찾아온다.


하지만 그 구토의 쏠림은 해소될 수 있다. 우리 눈에 포착되는 사물들에는 본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명확한 존재 의의가 있는 존재다. 책상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단 한 가지에 대해서 그 구토는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바로 '나'에 대한 존재를 탐구하는 순간 찾아온 구토다. 왜 해소되기 어려울까? 내 존재는 그야말로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존재 자체에 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이 우연한 피투성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고 실존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사물과 다르다. 우리의 사물처럼 무엇을 위해 만들어져 소멸할 때까지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 무엇을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소멸할 때까지 이용당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에게 모든 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터무니없이 무거운 존재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그 존재와 삶을 긍정하고 개척해나가는 것이 실존이다. 우리의 존재는 '피투성'이며, 그 자체로 우리는 삶을 개척해나갈 자유와 선택, 책임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떠맡겨진다.


이 실존적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 스스로를 향한 구토에서 해방될 수 있다. 비록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분명히 알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란 존재는 그런 자유가 있다. 로캉탱은 문학이란 도구를 통해 스스로를 향한 구토감에서 해방된다. 나 역시 책 읽기와 글쓰기 등 삶의 여러 부분을 통해 실존하려 발버둥 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실존이 과연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에 대한 존재의 불안은 있으나, 구토는 없다. 삶을 개척해나갈 자유를 인정하고 그 세계의 부조리한 강요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로캉탱이 실존의 방법으로써 문학을 선택한 것처럼, 나도 특정한 무엇을 선택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실존은 특정한 방법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영위하는 삶 자체가 실존이어야만 한다. 폭력적으로 주어진 이 내 삶을 찬란히 빛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에 대한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껏 실존하며 살아가려 한다.


로캉탱이 방황하던 끝에 마침내 구원의 광명을 찾아낸 것처럼, 난 이미 그 구원의 광명을 찾았을 수도 있고, 더한 광명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만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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