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불안사회』
희망만이 살아남음을 넘어서는 살아 있음을 되찾게 해 줄 것이다. 희망은 삶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날개를 달 의미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희망은 미래를 갖게 해 줄 것이다.
일단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원제는 『Der Geist der Hoffnung』로 '희망의 정신'인데 도대체 왜 이걸 '불안사회'라는 말도 안 되는 번역을 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이 훌륭한 철학서를 현대 사회 문제만을 지적하는 책으로 독자에게 해석을 제한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난 이 책을 읽은 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3권이나 선물할 만큼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다만, 이 제목은 참을 수가 없어서 내 소중한 서평 한켠에 이 분노를 담아두고자 한다.
저자 한병철은 단언컨대 실존주의자로 보인다. 희망을 찬양하는, 즉 미래를 노래하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강한 언명은 인상적일 만큼 실존주의적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자기만의 삶의 철학과 태도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굳게 다져진 삶을 대하는 대전제가 타인으로 하여금 강압과 강요 내지는 다른 선택지의 배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질 우려가 상당하다.
한병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희망이 발견되고, 인간은 희망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환경에 굴복해 삶을 굴복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병철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희망 찬가는 그만의 실존 방식인 것이다. 희망이라는 '미래'에 항상 '열려 있음 (가능성)'의 태도로 삶에 임해야 하는 것은 그만의 삶의 태도와 윤리인 것이다. 그 이외의 누군가가 이걸 완벽히 습득하거나 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모든 산물이 한병철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의 입장에서 논리와 당위가 부족하다는 것만으로 그 철학과 태도, 윤리를 절하해서는 절대 안 된다. 나로부터 발화한 공고한 철학은 그 자체로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다. 틀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다름을 비교해 보고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병철의 철학과 나의 철학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한병철은 미래를 그 자체로 도래하지만 결코 도래하지 않을 희망으로 설정하는 반면, 나는 미래를 끝없이 도래하는 현재의 연속으로 받아들여 지금의 삶을 사랑하는 행위와 마음을 통해 그 미래를 맞이한다. 정리하자면, 나는 미래(희망)의 의미를 현재로 포섭하고, 한병철은 그 포섭 행위가 없다. 그래서 한병철은 인간은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고, 나는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각자의 대전제는 스스로에게 절대적 논리와 당위를 갖지만, 서로는 물론 타인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존재할 가능성도 품고 있다. 하나는 같다. 대책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피투성'으로 점철된 우리 존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양식에 각자마다의 철학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 존재는 '시간성'이라는 절대성 아래에 놓여 있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현재는 끝없이 사라져 과거가 됨과 동시에 미래라고 여겼던 것들이 끝없이 도래하고, 미래는 영원히 우리에게 미래로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이 시간성의 절대적 개념 앞에 인간은 존재의 양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라는 개념을 희망으로 만들어 마침내 죽어 없어지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실존으로 이끌 수 있는 철학을 고안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반드시 희망적이어야 한다?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질문에 답은 당연히 '아니오'일 것이다. 다만, 각자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린 최종적인 그 삶의 대전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어떤 삶의 윤리와 태도로 접근했는지는 굉장히 큰 가치가 숨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