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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dden pleasures Jan 28. 2023

Life with God 8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의미 1>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의미 1> 나에게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는, 수수께끼 같던 질문들의  열쇠.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임과 동시에 큰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었다.


최근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즐겨들으며 성경을 보는 관점이 진전하게 되었는데, 큰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의도하심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읽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기에 오늘의 인간의 삶처럼 성경안의 스토리들은 황당하며, 비합리적이고, 이해가 가지않는 논리적 흐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오히려 사실적이며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안에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막연한 그림 -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  가지고 있던 나는 때때로 주님 곁에서 영원동안 그렇게만? 하며 의문을 가졌지만 덮어두고 깊게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오늘, 당장의 삶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을 때때로 묵상할  밖에 없는 지금은 죽음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   밖에 없는 상황이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쌓아온 개개인의 그리고 함께하는 삶의 의미는 죽음 이후에 이곳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어떻게 해석될까?

놀랍게도 나는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유행했던 “이생망”- 이번생은 망했어- 라는 말은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말하는가?

어르신들이 보통 하시는 말씀 “이젠 다 살았는데 뭐…”는 자신의 삶과 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이 세상의 삶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 결정을 표현하는 태도가 아닐까?

나도 별차이 없이 이 세상의 삶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온갖 좋은 것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아이러니하게 항상 열등의식과 부족함을 느끼고, 성공하는 법, 부자되는 법에 눈이 돌아가고, 한켠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래서 되는가 하는 답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평행선을 가지고 살아왔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흔히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고, 후회되는 일들을 꼽아보고, 먼저 간 자들의 그 기록들을 들춰보고 자기를 반성하고 잘 살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에게는 허전했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인상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는 이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지난 주 공동체의 어린 지훈이가 주님 곁으로 갔을 때 나는 죽음의 의미를 또 고민했다.

전신화재를 입었던 이지선씨도 생각이 났다.

순교당했던 선교사님들도 생각이 났다.

이 땅에서 그 삶의 의미가 왜 유익이 되는가?

죽음을 통과한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던 나는 생각지 못했던 유방암의 뇌전이라는 상징적인 병명을 통해서.. 병원에서 의사가 예후가 좋지않다고 냉정하게 말해주는 통계전달을 받으면서 더욱 두려워했는데

죽음에 문 앞에 서 있는 이 시간을 주님은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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