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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l 07. 2023

돌아가기엔 다급한데요

보이지 않는 것

"지금 너무 조급한 것 같아요. 그래서 몰입도 안되고 겉핥기식이에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학교도 다녀야 했고 알바도 가야 했고 동아리도 가야 했고 여행 오는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야 하고. 미리 소설을 써두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한 오산이었다.


시놉시스를 몇 번이나 갈아엎고 초고를 버리고 또 쓰고 또 쓰고. 나한테는 필요한 건 제대로 된 글이었다. 어떻게든 하나를 완성하는 걸로 의의를 두는 시절은 지났다. 작품성도 있고 주제도 있어서 공모전에 낼 수 있을 정도의 글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부족했고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급했다. 급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매번 급했다.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기보다 절벽 앞에 날 몰아세우는 방식으로밖에 하지 못했다. 급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나오는 동력들을 사랑했지만 동력만큼 지쳐갔다.



결국 저번주 합평 이후로 처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쉴 시간이 필요했다.



다들 합평은 들을 걸 듣고 버릴 걸 버려야 하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내가 작품에 줏대가 없는 건지 버려야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소재에 혹하는 이유는 내가 내 소재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고 결말이 모호한 이유는 내가 캐릭터 설정에 미흡했기 때문이다. 겉핥기. 그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내 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었다. 잔인한 말이었음에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내 주인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니까. 정해진 스토리 라인에 따른 주인공의 생각이나 의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주인공 개인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었다. 잘 짜인 캐릭터가 아니었고 나는 주인공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글이 묘하게 떠있다고 느꼈던 게 이런 부분에서 온 거였구나.



지금 완성된 분량은 A4 52장. 여기서 모른 척 마지막 합평 시간까지 쓴다면 완결 분량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뭐든 되겠지. 쓰레기든 똥이든 뭐든 나오겠지. 하지만 나한테 필요한 건 쓰레기 열 개가 아니라 멀쩡한 작품 하나였다. 다시 쓰지 않아도 아무도 날 나무라지 않는다. 완결까지 보고 싶다는 내 욕심도 채울 수 있을 거고, 끝까지 쓰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제대로 들을 수 있겠지. 그럼에도, 새로 제안받은 소재가 매력적이라서, 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분들은 잘 나아가고 있다. 재능 있다고, 글을 계속 썼으면 좋겠다고 칭찬받는 분들은 많았고 나는 빙빙 돌고 돌고 돌기만 했다. 나에게 나쁜 말들은 흘려보내야 하는데 고이기만 해서 내 안에서 썩어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게 즐겁지 않고 괴로웠다.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남들은 나아가는데 나는 나아가지를 못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원고를 쓰고 버리는 시간들이 정말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왜 내 노력들은 보이지 않고 흩어지기만 하는 것들인지. 마음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작가님에게 조언을 얻어볼까 싶어 메일 쓰고 지우 다를 반복하던 중,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3년 전쯤이었다. 나만 뒤처져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다 자신의 길을 향해서 하고 싶은 걸 향해서 나아가는데 나만 가만히 있었다. 정말 억울했던 건 그때의 나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중국 드라마를 보고, 자전거를 타고, 씻고 아침을 먹으면 중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세네 시간씩 글을 썼고 그림을 그렸다. 영상 편집할 게 있으면 간간히 편집도 하고 학회활동 준비도 했다.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의 결과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들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대외활동을 시작하고, 동아리에 들어가고. 무언가를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인스타를 볼 때마다 열등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시간 낭비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즐겁기만 한 삶은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내 목을 점점 죄여왔다. 결국 언제나 선망하던 친구가, 경쟁률이 높은 활동에 합격한 것을 보고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의 성공과 나의 성공은 어떠한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쟤는 저렇게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시간낭비를 하고 있구나.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엄마아빠에게 말했다. 내 친구들은 다 잘하고 있는데 나만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별 거 아닌 일이 얼마나 서럽던지, 나는 노력하고 있는데도 내 노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아빠가 해준 말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잘하고 있다고,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지금 나는 그저 노력하는 시기일 뿐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당연하고 뻔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결과론자인 데다 노력하지 않는 인간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아빠가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나보고 이야기했다. 잘하고 있는데 왜 울어. 사람마다 속도는 다른 법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전혀 위로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부분에 엄마아빠는 가장 큰 지지대가 되어줬다. 내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때면, 그럴 힘이 없거나, 너무 괴로워서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을 때면, 엄마아빠는 굳건하게 내 곁을 지켜준다. 반대로 내가 의지가 확고하고 절대 굽히지 않을 때면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한 교육법은 나에게 잘 맞았다. 못하게 하는 건 더 하고 싶어 졌고 포기하고 싶은 건 더 오래 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게, 3년 만에 입증이 됐다. 난 그 뒤로도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했고 5급까지 딸 수 있었다. 앞으로 6급은 물론, 자금을 모아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단시간에 공부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꾸준히 공부했기 때문에 내 기초는 단단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때부터 노력해서 내 브랜드를 만들었고, 일본에서도 페어에 나갈 수 있었다.

소설은 지금도 계속 쓰고 있으니까. 그때 썼던 것들이 없었다면 내 소설은 지금보다도 미숙했을 것이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내 생활 패턴을 바꿀 수 있었고, 시작한 운동은 지금 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내가 해온 선택을 믿기로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답답한 이 순간도 결국 나중에 바라본다면 하나의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쓰기 위해서, 더 나은 이야기를 위해서 힘든 선택을 하겠다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로 남고 싶었다. 나아질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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