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을 봤다. 어린 나이인데도 알차게 사셨네요. 그 말을 오랜만에 들었다. 두 군데의 면접을 보면서 칭찬을 쉴 새 없이 들었다. 너무 열심히 살았다, 추진력이 강하다, 성실하다, 말을 너무 잘한다, 글을 많이 쓰고 많이 읽는 사람 같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냐는 말에 바보처럼 허허 웃었다. 난 좀 열심히 살았지, 하는 자부심에 취해있지도 않았고 겸손한 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의미 없는 취미가 뭐가 있냐고 물었을 땐 당황했다. 남들이 보기엔 제가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고 있는 걸로 보일 텐데요? 운동이나 글쓰기처럼 건설적인 취미 말고,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 나에겐 그 두 개만큼 시간을 허비하는 취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웹툰을 보는 건 내 인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취미생활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를 나서는데 내가 뭔가 제대로 한 게 있나 의심이 들었다.
육각형 인재라고 스스로 여기면서도 난 그걸 납득하지 못했다. 한 분야에서 레벨 10을 쌓는 것과 네 개 분야에서 레벨 3을 쌓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놓지 못해 질질 끌고만 가는데 사람들은 그걸 열심히 산다고 했다. 열심히 산다는 건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난 결과가 없잖아. 그럴 때마다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된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박하면 사람들은 내가 너무 갓생을 살아서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난 내가 스스로에게 엄격한지 되돌아본다.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위를 바라보고 있는 탓일까? 나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 자조적으로 변한다. 이거 가지고 뭐. 그건 아마 내가 가진 열등감과 조바심 때문일 거다. 결국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다.
연료가 떨어진 기분으로 올해를 살았다. 우울을 앓았다고 하기엔 즐거웠다. 난 일분일초를 불살라 노력해야 하는 타입이었는데 이젠 여유와 휴식이 좋다. 누군가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그럼에도 혼자 있으면 허탈함과 공허함이 몰려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바빠지자 해결이 됐다. 내가 무엇이든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열망이 나를 갈아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리고 2월부터 새로운 글을 썼다.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의심했다. 그게 가장 쉬운 해소법이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내 글이 점점 변해갔고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이 소설을 왜 쓰려고 했더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어려웠고 그걸 해내가다 보니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꾸역꾸역을 넘어서, 이 정도 분량이면 되겠지. 오만한 마음으로 글을 해치운 날이었다. 처음으로 혼이 났다. 제대로 쓰지 않았다고 작가님은 화를 냈다. 의문은 짧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사실 글을 쓰기 싫었고 힘들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쓴 게 아니라 대충 썼다. 스스로도 몰랐던 지점이었다. 깨닫자마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왜 그런 일을 선택했는지 창피했다. 네가 이러고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틀은 머리가 번잡했다. 삼일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앞을 쓰지 않으면 뒤를 못 쓰는 타입이냐고 작가님이 물었을 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앞을 쓰지 않고선 나아갈 수 없는 타입이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 맥을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시작이 없고서야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나올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작가님께 남아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이어서 쓰라고 하셨는데 정말 죄송하다고. 도저히 앞을 쓰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남은 합평은 고작 한 번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작가님은 동의해 주셨다.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쓰는 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상상력과 소재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구성 능력이 굉장히 탁월하다고. 작가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고. 그게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흔들리던 문장도 많이 안정됐지만 나의 유일한 단점은 캐릭터였다. 인물이 전형성을 띈다는 점. 설명을 들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며, 괜찮다면 대면 장편소설 반에서 함께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누군가 나의 글을 기대해 준다는 게, 나의 성장에 아낌없이 조언해 준다는 게 너무나 감사했다. 작가님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어주셨고 나에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 모든 게 나의 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실까. 나는 이 애매한 재능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방황하던 마음이 오랜만에 바닥에 발을 붙였다. 하고 싶은 것들을 계속 해내가자. 나의 방황과 고독과 기쁨과 슬픔과 자괴감과 열등감과 좌절과 불안은 경험이 되니까. 과거의 나는 나보다 약하기도 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기도 하다. 현실이 불안할 때면 난 과거에게 질문한다. 분명 내가 살아온 시간인데도 과거는 불투명한 답만 내놓는다. 그게 어쩐지 위안이 된다. 난 그렇게 불투명한 마음으로 많은 걸 해왔구나. 지금 하는 고민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기력한 순간에도 뭐든 해보자. 지금의 행복에 안주하지 말자. 더 행복해질 지도 모른다. 그건 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나를 믿자. 아래를 보지 말자. 아래에는 내가 놓인 현실이 보이니까 언제나 위를 보자. 언제 닿을지 모르는 위를 향하자. 아직 가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