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 째, 내가 누굴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던가 여우가 되지도 못하는데
초등학생 때 배운 적이 있다. 슬픈 사람이 있으면 위로해주라고. 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나눠주라고. 그 땐 위로가 참 쉬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보니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남을 위로할 자리, 슬픔을 나눠받을 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이 여유롭지 않아도 내 마음만은 여유있길 바랬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친구가 울면서 부서장님과 면담을 했다고 했을 때, 나도 부서장님과 면담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이 틀렸던 것일까. 나보다 연장자이고 지혜로운 어른이라면 분명 해결책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면담을 신청했다.
부서장님은 내 면담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는 출근하기 두 시간 전에 만나자고 하셨다. 부서장님을 뵙고 내가 처한 상황을 말씀드렸다. 하루하루 욕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러자 부서장님이 말씀하셨다.
"00아, 넌 네가 곰이라고 생각하니 여우라고 생각하니?"
"...네?"
"우선, 여우는 아니겠지. 네가 여우처럼 했으면 선생님들이 너를 욕했을까?"
"..."
"직장은 그리고 사회는 달라. 학생 때는 곰처럼 공부해서 성과가 있었겠지. 그런데 직장은 여우처럼 해야 해. 누군가가 널 싫어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라고 빨리 인정하고 고쳐나가야지. 상황 탓을 하면 되겠니?"
"전... 방향을 잃은 거 같아요....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해결보다는 네 탓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니까. 다른 선생님들한테 들었어. 너의 태도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했길래 그 선생님들이 널 그렇게 욕하는 거야? 네 잘못에 대해서 먼저 반성은 했니?"
".... 네. 했습니다."
"봐. 지금도 이렇게 대답이 느리잖아. 날 상사라고 생각은 하는 거야?"
"아아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부서는 신입이 자주 바뀌는 곳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신입들을 좋게 볼 선생님들이 없지. 다들 나가버릴 걸 아니까. 그래서 너는 마이너스에서 시작한 거나 다름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노력해야 해. 출근길에 커피를 사오던지. 간식거리 좀 가져오던지. 아니면 선생님들 업무를 도와드리던지."
"네...?"
"왜, 이번 달 월급 받지 않았어? 월급을 받았으면 턱을 내야지. 참고로 병원 카페 커피는 안돼. 적어도 별다방 이상 정도. 간식거리는 호텔 수제 쿠키 정도는 되어야 선생님들이 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니? 그리고 이걸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해? 센스있게 눈치있게 알아서 준비하면 얼마나 좋아?"
신입들의 첫 턱. 신입이 첫 월급을 타고 부서에 간식을 돌리는 것. 사실, 이건 병원자체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악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악습은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었고. 신입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게는 30만원 정도의 간식 혹은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분명 간식비다 뭐다 하면서 부서마다 따로 가져가는 내 월급도 있었다. 부서교육을 받을 때도 이런 건 준비 안해도 된다고 들었었는데....
설마. 이것 때문에 월급날 이후로 괴롭힘이 심해졌던 것인가?
"내일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와. 내가 병동에 네가 가져왔다고 말해줄테니까. 선물 물건 같은 거면 더 좋고. 내일 사와서 나한테 컨펌받고."
오늘의 면담결과는 이랬다. 여우처럼 굴 것. 선물을 사올 것.
내 처지가 이러면서... 어제 내가 친구를 위로하다니...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힘내라고 응원하다니...
우선, 내가 해야 할 건 이거였다. 어떤 곳에 가서 선물을 사야 하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나는 컴퓨터를 켜고 서치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