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간호사의 취준일기. 그대는 한 순간도 빛나지 않던 적이 없다.
열일곱 번째, 난 살아야했다. 그래서 퇴사를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다. 나는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라는 질문이 먼저 들린다. 그렇다. 내가 퇴사하는 특별한 사건이나 이유는 없었다. 내가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날은 딱히 내가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혼을 난 것도, 조직에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퇴사를 해야했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작은 신호 때문에. '번아웃'
번아웃을 겪으면 당장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미련이 없게 된다. 시간감각도 공간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하던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거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번아웃 초기 상태이니 금방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번아웃을 겪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때가 위험한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잘 눈치를 못챈다는 것이다. 매번 감정적이던 사람이 잠잠해지니까 다들 적응해서 그런거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난 적응해서 내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번아웃이 조금만 더 지속되면 난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 횡단보도에서처럼.
난 살아야 했다. 그래서 퇴사를 마음먹었다.
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부서장님을 찾아뵈었다. 부서장님은 당연히 안된다고 하셨다. 나를 트레이닝 하는데 든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포기하냐며 자신의 손해이니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아, 내가 필요한게 아니라 조직이 힘드니까 자신이 힘드니까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선생님. 이 곳에 들어와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하고 보람되었던 적이 없었어요. 항상 누군가의 일을 떠맡고 혼나고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하루하루 해내가는게 저에게는 이곳이 지옥이에요."
"누구나 처음엔 그런거야. 다른 선생님들은 안그럴 거 같니? 다른사람들은 너보다 더 많이 혼나고 더 많이 힘들었어. 그런데도 다들 잘만 버티는데.. 여하튼 요즘 아이들은....!"
"일만 힘든게 아니었어요. 이 조직은 절 보호해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모두 그걸 회피하려고 하죠. 그리고 그걸 모두 신규의 잘못으로 돌려요. 전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겁이나요."
"..."
부서장님도 알고계셨을 것이다. 선배님들이 잘못을 신규에게 떠맡기고 시말서를 쓰게 하는 것을.
물론 신규들은 업무미숙으로 인해 시말서를 쓸 일이 많다. 안그래도 자신의 잘못으로 시말서를 쓰면서 죄책감을 가지는데 선배들의 잘못까지 안을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심장이 빨라졌다. 조직입장에서는 한 명이 실수한 것 처럼 모든 것을 마무리하면 좋은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신규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그만 실수에도 심장이 콩알만해지는데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시말서를 쓰는 것은 심장을 가루로 부수는 일이었다.
"너... 말대꾸하는 거랑 네 눈을 보니까... 내 말 들을 생각이 없구나..."
내 눈은 이미 퀭해져있었다. 평균 5~6시간의 수면시간. 출근 전과 퇴근 후의 공부. 내 몸에 쏟아부은 커피, 드링크 등의 각성제가 내 눈의 초점과 시야를 방해했다.
"부서장님...."
"3일 후에 팀장님 면담 신청할 거야. 네가 지금은 몸이 힘들어서 그런거니까. 3일 후에 여기서 다시 보자. 쉬고 와."
내게 주어진 시간 3일. 나는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짓고 싶은데 3일이라는 시간을 주시니까 너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3일이면 병동에 내 소문이 퍼지기 충분한 시간일텐데... 책임을 회피한 간호사. 조직을 져버린 간호사. 이렇게 말씀들하시겠지.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들이 모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말 이게 맞는 선택인걸까.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올바르게 한 것일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에 대한 공포가 모두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