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잘 상처받았다. 종이인형처럼 남의 말에 잘 펄럭였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서 한 말이 아닌데도, 그 말을 내게 대입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가령 예를 들어서,
"내 아는 친구 딸이 이번에 좋은 자리에 취직을 했다니까. 그 딸이 제대로 효도했어."
좋은 자리에 취직하지 못한 나는 불효막심한 딸이 되었다.
"그 사람 피부가 얼마나 하얗고 좋던지. 부지런하게 관리를 잘했나봐."
칙칙하고 트러블 있는 피부를 가진 나는 게으른 사람이 되었다.
"걔는 이번에 국영수 다 100점 맞아서 1등급 이더라. 좋은 대학가겠어. 진짜 대단해."
시험 망해서 좋은 대학 가긴 글러버린 나는 하찮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 애는 얼마나 똑똑한지 벌써 한글 다 뗐지."
한글은 커녕 숫자도 아직 모르는 우리 아이는 바보멍충이가 되었다.
이런 식이다 보니 상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상대가 의도를 갖고 한 말 뿐 아니라 의도가 전혀 없는 말 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를 갈구하면서도 회피하게 되었다. 왜 나는 저 사람의 말에 이토록 휘둘리는 것일까. 아니, 이유는 뭐가 됐든 상관없어. 그냥 휘둘리지 않고 대화하고 싶다고!
코로나 시국,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거리두기 하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포옹은 커녕 악수도 하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서 인사하고, 식당은 한좌석 띄어 앉기, 학교 급식실은 칸칸마다 투명 아크릴 판을 설치하여 상대방에게서 튀어나올 비말을 막아냈다.
대화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 같다. 상대의 말이 아무런 방패막 없이 나를 향해 곧장 날아와 버리지 않도록. 바이러스가 내 몸에 침투하는 것 마냥, 그 사람의 말들이 내 생각과 섞여서, 내 생각을 눌러서 생각의 자유를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날아온 말들로 나 스스로를 찔러 피를 흘리지 않도록.
니체는 '현실이란 없으며 오직 관점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너의 현실은 너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의 현실은 나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요즘의 나는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주어를 나로 바꾸지 않도록 노력한다. 상대방의 말이 슬그머니 바이러스를 내 몸속에 침투시킬라 치면, 재빨리 처방약을 내린다.
"그래, 너는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난 아니야."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면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해도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