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탈로칼비노 #에디토리얼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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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마을과 그 마을에 사는 가문의 백 년의 역사를 다룬 방대한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은) <백년의 고독>을 읽었을때 백 년이라는 시간을 부엔디아 가문을 지켜보며 몸으로 흡수한듯했다. 그때 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었고, 조사를 하다, 환상 소설을 말할 때 거론되는 세 명의 이름 (보르헤스, 마르케스, 칼비노)'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환상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백 년의 고독을 인생의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유럽과는 다른, 이국적인 남미의 풍경, 분위기와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도 일상을 환상으로, 환상을 일상처럼 그려내는 신묘함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술','환상'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책을 즐겨 읽어 본 적은 없다. (해리포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을 파고드는 '현실적인' 소설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이 합쳐진, 환상을 통해 현실의 무언가를 기묘하게 묘사하고 현실의 사물들을 오히려 마술처럼 보이게하는, 그렇게 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주는 소설이 나의 이상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책의 서평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책은 이탈로 칼비노의 생애를 쭉 훑는 것으로 시작한다. 1923년 그는 쿠바 아바나의 도시 산티아고 데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어난다. 문학에는 뒤늦게 눈을 뜨게 되고, 귀환병들에게 주는 특혜로 토리노 대학교 문학부를 등록한다. 계속해서 잡지에 기고하고 에디터와 편집자, 작가 생활을 병행했다. 그렇지만, 그의 작가 생활은 초반부터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출판을 거절당하기도 했으며 문학상을 수상 실패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계속 글 쓰는 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청년 시절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어떤 분명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후에 공산주의에 합류하여 유격대와 나치 파시스트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전투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57년에는 당원들과의 여러 논쟁, 의견 불일치로 인해 탈당하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동기에 의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타불라 라사'(비어 있는 판, 백지상태)에서 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정의했다. (...)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에 중요했던 것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활동적이고 조직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이탈리아 공산당에게서 활동하는 시기에도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불안하게, 또 개인적으로 연결하며 계속 진행된다) p22-23
61년부터 명성을 얻게 된다. 62년, 에스더 주디스 싱어를 알게 된다. 그는 세계 이곳저곳을 다닌다. 64년 결혼한다. 85년, 하버드 강의에 초청된다. 하지만 강의 원고(다음 천 년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를 집필하던 중 6장을 다 쓰지 못한 채, 뇌출혈로 쓰려져 85년 9월 18-19일에 숨을 거둔다.
이 유작은 완성되지 못했던 여섯 가지 강의의 원고를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아내 에스더 칼비노가 출간한 것이다.
그는 이 원고에서 문학에서의 다섯 가지 주제를 설명하며 수많은 신화, 작가, 작품 등을 언급한다. 그의 풍부한 지식이 책 전반에 드러나는데, 내가 모르는 작품들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다소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책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 글은 문학의 중요 가치들에 관해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빠지고 확장되곤 한다. 특히, 정확성을 다룬 장에서는 '무한', '우주'에 대한 장황한 연설이 이어지며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읽다 보면 어떤 주제가 명확히 잡히기보단, 계속 확장되는 지식의 파편들을 보는 느낌이 든다. (칼비노 사후에 정밀한 편집 과정 없이 메모와 같은 글을 출간했기 때문이 아닐까?) 말 그대로 이론강의를 하다 종종 삼천포로 빠지는 교수의 강의를 듣는 듯했다. (인간적으로 느껴졌다)하지만 이것은 그가 소설가이기 때문인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나의 단상, 이미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글이 그 자체로 계속 확장되어 플롯을 사진 거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런 메커니즘이 그의 원고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때로 나는 쓰고자 하는 이야기에 전념해보려고 애쓰다가 정작 관심이 있는 대상은 다른 것, 혹은 정확한 게 아니라 내가 써야 할 주제에서 배제된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p174
책에는 다섯 가지(원래는 여섯가지였어야 할) 문학적 가치가 나오는데, 그중 나에게 흥미를 일으켰던 두 가지 가치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다섯 가지를 다 다루기엔 그들이 너무 방대하거니와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칼비노는 1장에서 문학의 가치 중 하나로 '가벼움'을 꼽았다. 어째서 가벼움이 문학에서 결함이 아닌,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칼비노가 말하는 문학에서의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접근 방법을 바꾸어야만 하고 다른 시각, 다른 논리, 다른 인식과 다른 검증 방법들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찾고 있는 가벼움의 이미지들이 현재와 미래의 현실로 인해 꿈으로 흩어져 버리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p88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세상의 모든 무거운 인생, 이데올로기,운명,정치와 같은 것들을 문학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문학만이 할 수 있는 표현법과 형식이라는 문으로 서술한다. 인간 실존의 고독과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잔혹함, 분열을 <반 쪼가리 자작>(말 그대로 반 쪼가리가 된 남자 이야기)이라는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것 처럼. 다른 예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들이 갖는 독특함과 오리지널리티는,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 자체의 뛰어남도 있지만 현실 세계의 무거움을 신비, 허구를 통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상보다 더 정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눈을 돌리고픈 현실의 이야기는 허구를 통해 계속해서 보게 하는 힘을 갖는다. (물론 현실을 정면 돌파하는 전통 소설 또한 그만의 매력이 있다.)그와 함께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을 언급하며 하드웨어보다 무게 없는 소프트웨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은 글에서는 근거가 충분치 못하거니와 과학 쪽의 예는 문학의 가치로서의 '가벼움'의 근거로는 잘 뒷받침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 외 루크레티우스,오비디우스,카발칸티,단테의 예를 들어가며 주장을 강화한다.
나에게 가벼움이란 모호함이나 경우에 따른 포기가 아니라 정확함과 결단력이다. p101
'가벼움'과 함께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2강의 '신속성'이다. 카룰루스 대제의 전설로 이야기를 열면서, 많은 변형된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 전설의 가장 매력적 판본인 쥘 바르비 도르비이판 카룰루스 대제의 매력을 이야기한다.
페트라르카의 라틴어로 쓰인 이야기는 세부적이며 감각적이고 도덕적인 주해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무미건조하고 간략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상상력에 맡겨지고 사건들이 신속하게 연속되어 불가피한 일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P126
요는 이야기의 '경제성'에 있다. 다른 변형된 중세의 전설들은 사건들의 '연결고리'가 부실하고, 페트라르카와 르네상스 작가들의 것은 '신속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에서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늘리거나 좁힐 수 있으며 하루에 오랫동안 머무르기도, (ex.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혹은 몇십 년의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기도 한다. (ex.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나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이것의 좋은 예는 '민담', '동화'이다. 그는 민담의 특징을 '표현의 경제성'이라고 한다. 아주 특이한 모험들이 기본 요소만이 설정된 채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또는 '요정들은 재빠르게 그들의 볼일을 봤다'로 축약이 된다. 이것이 텍스트가 간결할 때 나는 특별한 기쁨이다.
즉, 이야기의 신속성으로 대변되는 중요한 요소는 '연결고리'와'리듬'이다. 언어는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전설이나 민담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들을 속도감 있게 이어 붙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현실과 같은 시간의원 리가 통한다면(예를 들어 이동 장면을 뛰어넘지 않고 다 넣는다면) 민담 특유의 이야기의 흥미진진함과 리듬감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게 짧은 글들은 시적인 데가있다. 보르헤스와 칼비노의 글은 대부분 짧은 단편인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 어쩌면 불친절한 문장들은 그것을 더 들여보게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고자 이야기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는게 아니라 언어라는 도구로 닿을 수 없는 곳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꼭 설명이나 묘사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