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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 Sep 21. 2021

‘다름’을 인정하니 오히려 ‘같음’이 보인다

영화 <모가디슈>를 보고


뒤늦게 관람한 <모가디슈>. 이미 유명하지만, 짧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1991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UN 가입을 위해 아프리카 대상 외교에 총력을 기울이던 한국 대사관 공관원들은 소말리아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북측 대사관 공관원들과 함께 탈출을 했던 실화를 모티브로 한 류승완 감독의 11번째 연출작.


“남조선의 도움을 받아 살아서 돌아가도 숙청될 텐데 아이들까지 반동분자로 만들 셈이냐”

“쟤들은 훈련받아서 맨손으로도 사람 죽인다던데.”

“양손 씁니다. 왼손만 쓰면 좌익이라고 할까 봐.”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반동분자’가 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비단 북측 공관원들만의 우려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또한 국가보안법이 2021년 현재까지 여전히 살아있다. 영화는 1991년의 상황을 묘사하지만, 사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북도, 우리도.



“서로 연설하지 말고 대화를 합시다.”


북측 대사관 공관원들을 받아들이고 난 후 한신성 대사가 림용수 대사에게 했던 대사. 언제나 남과 북 사이에 필요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 사회에서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더욱 꼬여만 간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도보 다리 대화가 인상 깊었던 이유다. 그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의미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정상 간의 대화가 어찌 친구끼리의 대화처럼 편할 수 있겠냐만, 어찌 되었건 얼굴을 마주하고 표정을 살피며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는 거니까.  



‘말’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북의 말에 자막을 넣는 게 다소 생소했다.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지 않나 싶었고, 영어에 대한 자막과 함께 나오니 너무 낯설었다. 찾아보니 류승완 감독의 전작 <베를린>을 본 한석규 배우의 아들이 ‘아빠, 저 나라 사람들은 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냐’고 물어서 충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류승완 감독이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을 ‘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타국으로 인지하고 표현하고자 했다고.


어느 언론에서는, 이제 같음보다 다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며 자막을 단 것에 호평을 보냈다고 한다. 오히려 나는 반대의 생각도 든다. 영화는 ‘다름’에 방점을 찍기 위해 자막을 달았으나, 영어나 소말리아어보다 북의 언어(문화어)가 너무나 잘 들려서 자막이 불필요하게 느껴지지 않던가(물론 표현의 낮은 난이도와 배우의 명확한 발음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를 통해 관객들은 남과 북이 생각보다 ‘같음’을 더욱 느끼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우리 투쟁 목표는 생존이다.”

“우리는 오로지 이 전쟁통에서 살아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남과 북의 공작원들은 사상과 가치관보다 중요한 목숨과 생존을 위해 어색한 공존을 하게 된다. 예전의 남북을 다룬 영화에 비해 굉장히 덤덤하고 어색하다. 서로 어색함을 덜어내는 씬이라봐야 깻잎을 잡아주는 장면 정도? 오히려 신파가 없어서 더 현실이 와닿았다. 갑자기 주적이었던 북의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면 아마 다들 저럴 것이다.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겠지. 싸운 지 80년이 다 되어서, 남보다 못한 친척이 얼마나 불편하겠나. 목숨 정도 걸려야 이 정도 공존이 가능하다. 바깥의 적만큼, 아니 그보다 더 불편한 관계. 그게 지금의 남과 북이다.



오마이뉴스의 이희동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모가디슈는 이제 남북관계가 신파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현재 남북한에는 같은 역사를 공유했던 세대가 저물어가고, 전혀 다른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가 주역이 되고 있다. 당장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만 해도 1980년대 생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같은 민족이라고 무턱대고 눈물을 펑펑 쏟기를 기대하고, 무조건 통일을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 대한 동의와 비동의를 떠나, 대북사업과 평화교육을 하는 단체의 (전)실무자로서 여러 생각이 혼재했다. ‘북’이라는 콘텐츠를 어떻게 다루어야 지금의 세대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지금 세대인 나의 고민.



“같이 살 방법이 있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비행기에서 내리면 절대 아는 척하면 안되니까 작별 인사를 여기서 나눕시다.”


신파는 없어도, 정은 든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함께 생존할 방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총알이 빗발칠 때, 남의 안기부 직원이 북의 어린이를 안고 달린다. 북의 공관원이 남의 안기부 직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상과 가치관이 달라도 도울 수 있고 고마울 수 있다. 내가 몸담았던 단체가 하는 일 또한 그런 것이다. 인도적 지원. 우리가 비록 사상과 가치관이 다르지만, 그래서 전쟁을 하고 서로를 죽였지만, 그래도 애들 밥은 먹였는지 물어보고, 약을 뺏긴 당뇨환자에게 인슐린을 건네주는 것.



탈출에 성공하고 케냐에 도착한 이들은 비행기에서 눈물을 참으며 생에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절대 아는 척할 수 없는 비행기 밖의 세상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북의 아이들은 자꾸만 저 멀리 걸어가는 남쪽 사람들에게 눈이 간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눈을 북쪽 어른들이 가린다. 선뜻 차에 오르지 못하는 한신성과 림용수. 아무런 대사 없이도 이 상황의 무게가 전해졌다(특히 등으로 연기하는 허준호 배우 씬은….).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지금 세대에게 <공동경비구역 JSA>될 수 있을까?’ 그 시절 그 영화가 우리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듯이, <모가디슈> 또한 지금의 현실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볼지는 각자의 판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렇다. 현재 80대라는, 실제 주인공인 강신성 당시 주소말리아 대사와 소식을   없는 북측 김룡수 대사가 죽기 전에 만나    기울이며 그때  일을 추억할  없다는 .  문장을 누군가는 억지 신파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먹먹한 현재다. 우리는 그들과 친구가 되기는커녕 인사와 안부를 건넬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화상회의를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지금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하고 이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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