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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 Apr 18. 2020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예요?

자존감 도둑 소굴에서 배운 것


  2014년 2월, 고시 준비에 발을 잠시 담갔다 빼고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내 손에 들려있던 것은 학사 졸업장과 725점의 토익 점수였다. 중국발 미세먼지처럼 바스러져 흩날리는 멘탈로 남들보다 늦게 취직 준비를 시작했다. 이리저리 헤매고 좌절하던 내게 단기 계약직 면접 기회가 생겼다. 아버지 지인이 회사에서 진행하시는 프로젝트에서 5개월간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서류를 내보라는 거였다. 다만, 조건은 토익을 최소 800점대로 올리라는 것. 한 달을 쏟아부어 830점을 만든 나는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을 보러 갈 때부터 나는 '설마 내가 되겠어?'라고 생각했다. 이미 기가 죽어있는 상태로 본 면접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면접에는 그 팀의 직원이 한 명 들어왔다. 그는 영어로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면접을 마치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연락드릴게요. 근데~ 솔직히 우리 회사에 토익 900점 안 넘는 사람 없을 걸요?ㅎㅎ" 집에 오는 내내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또 그 사람 말에 동의하며 '그래 내가 무슨...'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있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엔가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첫 출근 하는 날까지 '도대체 왜??'라는 의문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업무인 건가' 아니면 '그래 영어가 다는 아니겠지. 열심히 하자!'라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근 첫날, 나는 파견 계약직으로서 그 회사가 아닌 파견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내가 일한 대가로 한 달에 150만 원을 회사에서 파견업체로 지급하면, 나는 그중 100만 원을 받을 거라고 했다. 사람 좋게 웃으며 계약서에 나란히 사인을 한 50대로 보이는 여성은, 그날 이후로 만날 일이 없었다. 한 번 만나 서류 작성하고 5개월 동안 50만 원씩 따박따박 받아 가다니. 쌩양아치가 따로 없다 싶지만 그때만 해도 '우와 백만 원이래...!' 라며, 내가 버는 돈이 마냥 많게만 느껴졌다.


  나의 직속 상사라는, 꽃대리1) 는 처음 출근해서 인사하는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아 네, 점심은 알아서 드시면 돼요”하고는 대충 자리만 안내해줬다. 나머지는 '같은 계약직의' 과장님이 함께 점심을 먹으며 설명해주었다. 팀의 구성이 어떻고,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떻고 등등. 보통 대리는 대리끼리, 사원은 사원끼리, 계약직은 계약직끼리 밥을 먹는다고 했다. 사내에서 쓰는 메신저에는 내 이름 앞에 [파견계약]이라고 쓰여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가 내 이름보다 계약직인지 정사원인지를 먼저 알게 하다니. 심지어 정규직과 계약직은 출입증 목걸이 디자인도 달랐다.


 꽃대리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내가 어쩌다 무슨 엑셀 함수라도 모르면 자기 책상 옆에 세워두고 온 사무실이 다 듣도록 타박했다.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예요?” 그의 입버릇이었다. 사무실 파티션이 낮아 다른 팀까지도 훤하게 뚫려있는 구조였는데, 아마 같은 층 쓰는 모든 사람들이 ‘저 애는 일 더럽게 못하나 봐’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똑같은 함수를 내 옆자리의 영어 잘하는 인턴이 모를 때는 “어머, 냥냥씨도 이거 몰라요?”라며 ‘그럴 수도 있지’라는 뉘앙스로 쉽게도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토익점수라도 좋았으면 달랐을까, 자책했다.


  취급하는 것에 비해서 내게 꽤 비중 있는 업무를 맡겼다. 당시 그 팀은 ㄱ나라에서 기업 매칭 행사를 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한국의 참가기업에 연락하고 통역을 배치하고 업종이 비슷한 ㄱ나라의 기업과 연결하는 일을 담당했다. 출근일의 77% 이상을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일하다가, 어쩌다 여섯 시에 정시퇴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내일은 열심히 할 거죠? ^^”라는 ‘농담’을 들었다. 몇 달 동안 생리도 거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내가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직원들이 전화로 ‘잘 챙겨줘서 고맙다’ 라거나 ‘ㄱ나라에서 만나면 인사하자’며 너스레를 떨어주실 때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위안과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ㄱ나라에 가지 못했다. 행사가 2개월쯤인가 남았을 때, 꽃대리는 내가 담당하던 참가 기업 관련 업무를 다른 계약직원에게 넘기고 내게는 그 직원이 하던 브로슈어 만들기 같이 ㄱ나라에 가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맡겼다. 그러고는 ‘모두가 갈 수는 없지 않냐’며 이해하라고, 점심 후 내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쥐어주고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때 나는 “네 이해해요, 멍멍씨는 일본어도 잘하니까 제가 가는 것보다 도움이 될 거예요” 뭐 이딴 말을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출장도 가지 않는 내게, 출장자들 나눠줄 키트를 만들고 그들의 항공 마일리지 적립까지 챙기게 했다. “사실 저도 가고 싶어요. 제가 기업 담당자들도 다 아니까 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스페인어 쓰는 ㄱ나라에 가는데 일본어는 상관없잖아요”라고 나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 토익점수라도 높았으면 말할 수 있었을까.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매달 토익시험을 봤다. 1월 725점에서 3월 830점, 4월 930점. 쭉쭉 오르던 점수는 5월 975점으로 정점을 찍었다(토익은 990점이 만점이다). 성적표를 받고 나는 정말 성층권을 박차고 나갈 만큼 기뻤다. 백 년 묵은 한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회사 정문에 현수막이라도 만들어 붙이고 싶었다. ‘보이냐? 나도 하면 된다 이거야. 당신들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뭔가 허무해졌다. 고작 이건가? 겨우 이런 거로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고 면박을 준거야? 막상 내가 맡았던 업무는 영어가 하나도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심지어 우리 팀에는 토익을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는 걸, 퇴사 직전에야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그냥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열심과 업무능력에 상관없이 그저 부장이 꽂은 낙하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그렇게만 보이기에는 좀 억울하지만). 아마 내 토익점수가 만점이었으면 점수에 비해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 등등 다른 이유를 찾았겠지.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고 자책하고 그들의 태도에 동의하고 내재화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


  행사가 끝나고 계약 기간이 한 달가량 남은 내게, 팀의 직원들은 재계약하고 다른 행사도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석 선물로 들어온 배를 좀 깎으라는 말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설프게 칼을 잡았는데 그 모습을 본 꽃대리는 또다시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예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재계약이고 나발이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 자존감 도둑 소굴을.


  지금도 그쪽으로는 똥도 싸고 싶지 않을 만큼 싫은 기억이지만 그 경험에서도 배운 것이 있다. 남들 기준으로 스스로를 낮춰 보지 말자는 것. 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못마땅해한다. 그러니 그건 더 이상 나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내 토익점수가 5점이든 990점이든 그게 내 전부를 무시할만한 이유는 될 수 없다. 5개월 동안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잘했으면 당당해도 된다. 여전히 남의 말에 다치고 속을 앓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나를 더 위해줄 수 있게 되어 아주 고오맙게 생각하고 있다. 땡큐!


1) 꽃꽂이를 취미로 배우던 사람이라 꽃대리라고 칭했다. 발음도 감정을 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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