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전장의 여자들>을 보고
"참전 군인도 잊히는 마당에 여성은 얼마나 더 쉽게 잊힐 것인가."
2차 세계대전의 그늘에 가려져 서양에서는 명칭조차 낯선 일본의 '대동아전쟁'.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잊힌 전쟁'이라 부르는 모양이었으나, 실상은 '잊은 전쟁'에 더 가깝다. 일본 당국과 참전 군인들은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잊고 또 왜곡한다. 당사자도 이러한데 제대로 알지조차 못하는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그들'의 전쟁이 한시도 잊힌 적이 없었다.
"사병용 위안소에는 조선과 오키나와 여성이 있었고, 장교용 위안소에는 일본 여성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일본군이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전시 강간에 대해 알고 싶어 예매한 영화였는데, 그곳에도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 천황 군대 소속 부인과 의사로 근무한 아소 테츠오는 100여 명의 '위안부' 중 80명이 조선인이었으며 대부분 성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고 증언한다.
그가 근무 중에 카메라를 숨겨 찍은 사진에는 위안부 규정 벽보도 있는데, 이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공식 증거가 된다. 규정에 따르면, 각 병사는 접수대에 2엔을 내고 표와 콘돔을 받는다. "사용" 시간은 최대 30분, 콘돔 없이는 불가하며 사정 후 즉시 퇴실해야 한다. 테츠오는 배부된 콘돔도 촬영했는데, 콘돔에는 '돌격 1번'이라고 쓰여 있었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대기 줄이 항시 있었으며 다다미 한 장에 여자 한 명, 칸막이도 없이 천으로만 가려져 옆이 다 보였다고, 그는 증언했다.
참전 군인이었던 일본인은 계급에 따라 위안소가 운영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라고 말한다. 장교용, 사병용, 육군용, 해군용이 각각 있었으며, 장교용에는 일본인 직업여성이, 사병용에는 조선과 오키나와 여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뉴기니인의 증언도 잇따른다. 그에 따르면 남태평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였던 코스모폴리탄 호텔에 일본인 여성 수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외모가 비슷해서 이렇게 추측했으리라 생각함). 자신들이 그들의 식사와 옷을 준비했고, 벌거벗은 차림으로 자주 1층으로 내려와 물탱크 아래에서 몸을 씻었다. 다른 뉴기니인 증언자는 그들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위안부'가 집으로 돌아갈 때 전투기가 하늘에서 그들에게 공격을 가했고, 그들이 탄 배까지도 공격했기 때문이다. 군 수송선은 엄격한 군법을 적용받는데, 군법에 따르면 군인 외에는 군견과 군마, 비둘기만 탑승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군사물자'로 등록되어 탑승해야 했다. 이는 그 배가 침몰했을 때, 사망한 여성들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인 간호 장교는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뉘앙스로 인터뷰에 응했다. 조선어를 쓰지 않아서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 어떻게 왔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배 어딘가에 타고 왔을 거로 추측했다. 그는 '위안부가 있어서 간호 병사가 안전했다'며 '우리가 그랬듯 그들도 나라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을 데려가서 현지 여성을 피해 주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도.
"어쨌든 그런 이야기는 다 과거니까요. 뉴기니에 대한 보상은 도대체 근거가 뭔가요? 우리가 지켜줬잖아요?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요."
감독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을 엇갈려 편집해, 피해자의 입을 통해 담담히 반박해나간다. 단지 파푸아 뉴기니에 살고 있었을 뿐인 주민들은 식량을 빼앗기고, 강제 노동과 전시 강간을 당했다. 그러나 참전 병사는 '대화를 통해' 식량을 획득했으며, 현지 여성들은 악취와 피부병이 심했기 때문에 손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도리어 피해자를 깎아내린다.
뉴기니인들에 대한 정신적 학대 또한 셀 수 없이 이루어졌다. 미혼 여성들을 모두 데려가서는 같은 현지 여성에게 그들을 감독하게 했다. 여성들은 밭일과 청소, 식량 수집, 포로 관리까지 해야 했다. 손이 묶여있는 포로에게 밥을 먹이고 담배까지 물리게 하더니 눈앞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이후 호주군이 파푸아 뉴기니에 왔을 때도 여성들을 모두 데려가서 강제추행을 했는데, 남편이 있다고 하자 잡혀있는 남편을 풀어주고는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수십 발의 총격을 가해 죽였다.
“나라를 위하여 애쓰신 군인 아저씨 덕분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파푸아 뉴기니 인들은 능숙한 발음으로 일본의 전통 동요인 '공과 영주님'과 전쟁 당시 군국주의 유행가인 '군인 아저씨 고마워요'를 암송한다. 그들의 표정이 슬퍼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슬프기 때문일까 내가 슬프기 때문일까. 서글픈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감독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함께 비춘다. '위안부' 추산 9만 명, 대부분은 조선 여성이며 뉴기니인의 피해는 추정할 수 없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 영화의 감독인 세키구치 노리코는 일본인 여성이다.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사람. 우리는 '일본 놈들', '쪽바리들'이라 부르며 일본 vs 한국 프레임에 익숙하다 해만 일본인에도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있고, 한국인이지만 '위안부'에 대해 자발적인 성 판매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세로로(일본 vs 한국) 나눌 것이 아니라 가로로(전쟁 당사자인 정부와 전쟁 피해자인 시민) 나누어서 봐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재일조선인 3세 선생님이 생각났다. 단순한 혐한, 혐일 논리로는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고 알릴 수 없다. 복잡하고 정교한 정치 외교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더욱 정교하고 예리하게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은 공부와 연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