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사회는 언제쯤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나에겐 오랜 친구가 있다. 이혼 후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30대 여성 지은 씨.
지은 씨는 흔히 말하는 경단녀였다. 6년 동안 전업 주부로 살던 그녀는 이혼 후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을지,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이와 자신을 생각하면 주저 앉을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격증을 따고 취업 준비를 했다. 마침내 그녀는 원하던 직장에 입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5년 째 성실히 일하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근무 평가도 좋았고, 동료들하고의 관계도 무난했다. 지은 씨 자신도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재취업에 성공한 만큼 가능하면 오래 근무하고 싶었다. 연차가 쌓일 수록 함께 늘어나는 능력치가 뿌듯했고 승진도 꿈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벚꽃이 흐드러지는 어느 날, 지은 씨는 사직서를 썼다.
그냥 평범한 날이었다. 점심시간 직전, 따끈하게 완성된 기획서를 팀장에게 전송하면 오전 업무는 끝이었다. 지은 씨는 홀가분하게 전송 버튼을 누르고 즐겁게 점심 메뉴를 고민했다. 그런데 팀장이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매우 심각한 얼굴로 지은 씨를 데리고 나갔다. 팀장은 낮은 목소리로 지은 씨에게 물었다.
"김대리, 뭐 이건 개인 사생활이긴 한데.. 그래도 이게 알고 그냥 넘어가긴 좀 그래서 말이야.."
"네?"
"자기 혹시.. 요새 바람 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자기가 보낸 파일, 기획서가 아니라 데이트 계획표던데?"
지은 씨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팀장에게 보낼 파일을 잘 못 클릭해서 그만 다른 파일을 보낸 것이다. '데이트 계획표'란, 지은 씨가 얼마 전에 만나기 시작한 남친과 공유하는 데이트 시간 계획표였다. 일과 육아와 연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가능한 일정을 정리해놓았다. 이런 사적인 파일을 잘 못 보내다니, 지은 씨는 자신의 손목을 자르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수습부터 해야했다. 팀장은 40대 기혼 여성으로, 평소 팀원들에게 언니나 누나처럼 편하고 따뜻하게 대하던 사람이었다. 지은 씨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지은 씨가 입사할 때, 회사의 누구도 지은 씨가 싱글맘인 것을 몰랐다. 요새는 개인정보 보호가 중요한 시대이고 면접 때 지은 씨의 결혼 유무도 묻지 않았다. 입사 후 자연스레 아이가 있다는 게 알려지고, 사람들은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남편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은 씨는 굳이 이혼 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없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개인적인 얘기는 피하며 직장생활을 했었다. 그러니 팀장이 '바람피냐'고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날, 지은 씨는 점심시간 내내 팀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팀장은 그동안 힘들었겠다며 지은 씨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런데, 일주일 쯤 되었을까. 회사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그 시선엔 동정, 호기심, 멸시가 골고루 섞여있었다. 간혹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직원이 있으면 참 고마웠다. 애초에 팀장이 철저히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볼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은 씨는 억울했다. 여전히 성실히 회사를 다니고 업무 능력도 그대로였지만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팀에 근무하는 입사 동기가 지금 회사에서 핫하다는 지은 씨에 대한 소문에 대해 들려주었다.
소문에 따르면, 지은 씨는 '수년 전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걸려서 이혼을 당하고 아이를 키우지만 끊임없이 남자들을 만나며 연애에만 주력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야말로 각색에 각색을 더하여서 새로운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은 씨는 바람을 핀 적도 없고, 이혼을 '당한 것'도 아니었으며 연애에만 주력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문의 진위 여부는 관심이 없었다. 파격적인 내용의 주인공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리는 것이 너무 재밌으니까.
얼마안가서 지은 씨도 직접 듣고 말았다. 세상 모든 비밀이 오가는 화장실에서, 그들은 신랄하게 지은 씨를 씹고 뜯고 맛보고 있었다.
"오늘 걔 입고 온 원피스봤어? 완전 딱 붙던데."
"화장도 무슨 애 있는 여자가 그렇게 풀메(풀메이크업)를 하고 다닌대? 그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
"걔, 딱 봐도 여우 처럼 생겼잖아. 눈웃음 봤어? 남자 관계 복잡한 애들은 관상이 달라."
지은 씨는 화장실에서 나와 자기 자리로 간 뒤, 바로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 날로 짐을 정리해서 집으로 갔고, 그렇게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녀가 저지른 업무상 과실은 파일을 잘 못 전송한 것 밖에 없다. 회사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불법적인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준 사실도 없다. 지은 씨가 회사를 갑자기 그만 둬야 할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없는 죄를 덧씌우고 죄인으로 만들고 비난했다. 이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풀메이크업을 해서,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어서, 연애를 해서, 비난했다. 난 아직도 이게 사직서를 쓸 만큼 죄가 되는 지, 비난 받을 이유가 되는 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모를 것 같다.
세상은 아직도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 부족해 보인다. 남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 던, 그대로 인정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어디에도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냥 응원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자신들의 좁고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며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감싸 안아줄 수는 없는 걸까.
지은 씨는 그 후 몇 달의 휴식기를 가진 뒤 다른 곳에서 새롭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 전 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자신의 사생활을 숨기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긴장하며 다니고 있다. 그녀는 마음의 벽을 더 두텁게 쌓았다. 이 곳은 그 곳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도 품지 않았다. 이게 아이와 함께 평안을 유지하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안타깝지만 나도 동의한다. 아마 대부분의 싱글맘은 동의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참 아프다. 관용의 사회는, 언제 쯤 이루어 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