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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무 Sep 01. 2021

지하철의 사계절

퇴사하는 날 만났던 사람들

사표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직한 회사에도 결국 사표를 냈다. 참 다른 의미로 능력자다. 이번 사직서는 사실상 권고사직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라, 상처 받고 무너지지 않기 위한 내 마지막 자존심과 같았다.


작은 회사에서 연봉 협상이 가능한지를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을까? 수습도 떼지 않은 직원의 순수한 질문이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도전장이었나 보다. 그 뒤로 대표는 내 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직속 상사는 나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카피라이터라는 꿈을 바로 눈앞에 두기까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오며 얼마나 아파했는데. 그래서 그들의 소리 없는 발길질과 조용한 비웃음에도 나는 정면으로 맞섰다. 참 미련하게도.

출처: Photo by Nadine Shaabana on Unsplash

손 안의 어릿광대


내가 쓴 카피를 팀장이 가로채서 대표에게 칭찬을 받아도 '날 다시 봐줄 가능성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가이드가 전혀 없는 타 부서의 잡무를 떠밀려 받아도 내게 일을 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해하며 '업무 관계를 이해하라는 연장선으로 일감을 주셨겠거니' 여겼다. 


내가 포함되지도 않은 프로젝트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길래 밤을 꼬박 새우며 자료 조사를 해왔지만,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내가 아직 배워야 할 게 한참 남았구나'하며 겸손한 자기 검열을 하기에 바빴다. 수심의 깊이도 모르고 하염없이 발길질만 해대고 있으니 지치긴 했지만, 지금 헤엄치는 이곳이 꿈의 바다인 줄로만 알고 마냥 뿌듯해했다. 


업무 내용을 평가하겠습니다


어느 날, 계속 묵묵부답이던 대표로부터 드디어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정규직 전환은 직원들을 제외한 셀프 업무 평가표와 팀장 2명의 평가를 기반으로 하겠습니다.
출처: 당시 받았던 메일 캡처

이 말인즉슨, 원래 정규직 전환은 직원 전원의 평가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되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제도를 바꿔서 나의 목소리도 반영하겠다는 뜻이다. 마치 넓은 아량으로 기회를 베푸는 척을 하지만 글쎄, 내 목소리를 들어줄 리가 있나.


그래, 어쩌면 수심의 깊이는 생각보다 얕았겠구나. 바다가 아니라 그들의 어항 속에서 놀아났으니. 평소 같았으면 억울함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을 텐데, 이제는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차라리 발 편하게 딛고 쉬다가 다른 곳을 향해 헤엄쳐볼걸.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내쳐질 바에야, 내 발로 직접 나가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자진 퇴사를 결정했다.


홀로 퇴장하던 날


사표를 제출하러 가는 날, 사무실에는 나 혼자였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건가 갸웃거리다가 바로 상황 파악이 됐다. 대표가 눈총을 피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전원 휴가를 내게 하도록 한 것이다. 서러움을 삼키느라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떨리는 손으로 퇴직서를 작성해 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쓸쓸히 걸어 나왔다.

출처: 퇴사하던 날 책상 위에 두었던 내 지난날의 흔적들

풍경이 유독 보이는 날


날씨가 참 좋았다. 회사에서 걸어 나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실감이 났다. 감정으로 달아올랐던 몸은 금세 이성을 되찾고 차가워졌다.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동안 수고했던 나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주고 싶어 졌다. 평소 출근길에 바빠서 지나치기만 했던 지하상가의 한국 전통 소품 가게에 들렀다.


쪼그려 앉아 가만히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볼펜 하나가 눈에 탁 걸렸다. 검은 배경에 연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펜을 손에 쥐고 계산대로 가자, 주인분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학생이에요?


평소였다면 온종일 떠올리며 기분 좋아할 말이었겠지만, 오늘은 뭔가 창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사연을 전혀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기에 그냥 적당히 대답해도 되었을 것을, 괜한 오기와 심통을 살짝 부려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직장인이었는데 방금 사표 내고 왔어요.

-그렇군요.


놀라거나, 위로하거나, 앞으로의 계획은 있냐는 걱정 어린 대사가 돌아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민망해진 나는 얼른 볼펜을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화분에 있던 꽃 한 송이를 빼서 같이 쥐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풍경이 많이 보이는 날이겠네요. 잘 들어가요 아가씨.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 드린 채 가게를 나왔다. 풍경이라니, 매일 질리도록 보는 게 풍경인데? 작은 친절에 크게 행복해진 나는 균형을 맞추려는 듯 툴툴거렸다. 한 손에는 연꽃 펜, 한 손에는 튤립 한 송이를 들고 얼굴이 활짝 피어오른 채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출처: 당시 사장님에게 받았던 튤립 한 송이, 연꽃 펜

고마웠어요, 속을 휘젓는 위로 한마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동갑내기 직장 동료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람이다. 우리는 몇 초간의 정적을 나눴다. 그토록 수다스럽고 발랄한 사람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나는 멋쩍게 웃음소리를 내어줄 뿐이었다.


-고마웠어요

-나도 고마워요, 이렇게 전화해줘서


지하철의 사계절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기 하나 없는 텅 빈 사무실에 있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곳은 사람들로 붐볐다. 바로 내 앞에 한자리가 나서 앉아갈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스트레스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오늘로써 말끔히 비워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지하철 속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나처럼 무표정으로 핸드폰만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자신의 책가방이 사람들을 치자 허겁지겁 앞으로 돌려 메는 학생은 봄이었고, 
더운 날씨에도 서로 꼭 붙어 뜨거운 눈빛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은 여름이었으며,
한강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넥타이를 풀고 바삭한 한숨을 몰아쉬는 중년은 가을이자,
새 생명을 잉태한 임산부에게 망설임 없이 자리를 양보하는 노인은 겨울이었다.
출처: 지하철에서 봤던 이들에 대하여 

무채색의 사람이 되어버린 나


지하철은 감정의 희로애락, 인생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간 삶의 축소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감정의 수평을 맞추려 애쓰고, 인생을 쳇바퀴처럼 도는 뻔한 무채색의 사람이 되어버렸는가.


빨간 튤립 한 송이를 쥐여줬던 소품 가게 사장님,

한마디 말없이 힘껏 마음을 달래준 동료,

저마다의 사연을 가득 품고 지하철에서 몸을 비비는 사람들.


그 풍경들은 앞으로의 내 삶에 작은 파동이라도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출처: Photo by Thor Alv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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