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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무 Sep 29. 2021

독담배, 돛단배

홀로 안개를 삼키는 뱃사공들


술은 마셔도 담배만큼은 절대 피우지 않겠다는 오랜 신념 따위, 절망 앞에서는 겨우 4500원짜리가 되었다.
신입시절의 나는 (내 기준) 그렇게 망가졌었다.



'원래 그때가 제일 힘들어. 눈 딱 감고 1년만 버텨.’


무심한 듯 들리지만, 세월의 상처에 먼저 딱지를 뗀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란 것을 안다. 사회초년생은 그렇게 설움을 삼키고 씩씩함을 토해낸다.



바다 한가운데의 범선


애쓰는 건 어렵지만 역류는 쉽다.

숨 쉬듯 살피는 눈치, 어디에 말도 못 하는 실수,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흘리는 자책은 순식간에 사람을 집어삼킨다.


어느 날, 팀장으로부터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신입 3대 삼각지대에 갇혀 하루하루를 허우적거리기만 해도 벅찼던 나는 그 순간 덜컥, 멈춰버렸다.


마음속이 파도처럼 어지럽게 울렁였다. 내 몸은 분명 서있는데 멀미가 났다.

균형을 잡으려 폐 속 깊이 들이쉰 숨은 오히려 안개가 되었고, 자욱이 끼인 먹먹함은 눈앞을 가렸다.


퇴근 후, 머릿속을 환기할 수 있는 강렬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평소라면 골목길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테지만, 그날은 홀린 듯 편의점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아무 담배나 검색해본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갑을 주문했다.


방황하던 날의 하늘


너무나도 쉽게 사버린 담배를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저녁 시간 하늘은 주홍, 보라, 군청 빛으로 물들어있었고 피곤함에 지친 자동차들은 저마다 빨리 가겠다며 경적을 날카롭게 울려댔다. 그 풍경을 보며 기지개를 켜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각자 참 치열하게도 살아가는구나.


이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비눗방울 빨대를 불듯이 잡았다. 불을 어떻게 붙이는지 몰라 민망하게 라이터만 틱틱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기 전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는 것처럼 시도했더니 성공했다.


급하게 들어온 연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콜록거리며 죄다 뱉어버렸다. 눈과 코가 너무 매웠다. 이 상황이 재밌기도 해서 혼자 웃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다시 씁쓸해졌다.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그 순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나 내 편이고 힘을 주려는 사람이지만 그날은 그런 당신의 응원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연초만 쳐다보면서 '응, 응, 그럼 괜찮지, 그래'만 되뇌다가 도망치듯 끊어버렸다. 잿더미가 힘없이 툭 툭 떨어졌다. 입 한번 댔던 첫 개피는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뒤에서 누군가가 옥상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설마 직원인가 싶어서 뒤돌아봤지만 낯선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머리를 두세 번 천천히 쓸어 넘기고 코를 훌쩍이다가, 젖은 눈가를 훔치다가, 결국은 소리 내어 흐느끼더라.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뭔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저 사람은 어떤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왔을까.



아무렴,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조각배가 반갑고도 아련했다. 잠시 동안 은근한 동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담배를 따라 꺼냈다. 직접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옆으로 이어진 그림자를 보며 느리게 호흡을 맞출 뿐이었다. 향만 입에 머금다가 흘려보내는 식이라 어지럽지는 않았고, 합쳐지는 연기를 이따금씩 바라보았다.


완전한 타인의 존재가 주는 위안을 함께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나 싶어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 사람이 먼저 일어섰다. 그리고는 정확히 내 쪽을 향해 목을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터벅터벅 조용히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가끔씩은 진한 응원보다는

연기처럼 가벼운 위로가 더욱 깊게 속을 휘젓기도 하는구나.



여운, 짙은


지금도 여전히 담배는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지만 예외적으로 그 잔향을 좋아할 때가 생겼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담배를 통해 독한 한숨을 내쉬는 사람을 이전과는 다르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쓴 연기 뒤에 남는 옅은 안개, 그것을 나눠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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