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필요한 물감들
팔레트를 펼쳐보면 네모난 칸에 스스로를 가둔 물감이 있다
자신을 '하늘색'이라고 소개한다
다른 색과 섞여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 두렵다
그러나 결국, 질서 정연히 짜 놓은 물감들은 옆 칸을 살피며 서로를 찾는다
유화처럼 두껍거나, 수채화처럼 가볍게.
그들은 섞일수록 알 수 없는 색깔로 물들지만
분명, 더 아름다운 빛깔을 내기도 한다
네 명의 식구와 함께 살 적에 늘 암막 커튼을 쳤다.
사람과 엮이는 것에 신물이 나서 대낮에도 어두운 잠으로 회피했다.
위험한 안락에서 깰 때면 책상 위와 바닥 밑에 뒤죽박죽 엉킨 물건들이 몸에 닿았다.
그때마다 더러운 무언가가 묻은 듯 툭툭툭툭툭 몸을 털고는 했는데, 이 모습을 본 엄마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자각했다. 이거 제정신 아니구나, 한참 잘못 왔네.
뒤덮여버린 나를 차근차근 닦아낼 용기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리셋하듯 독립했다.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깨끗한 네모칸.
이곳에는 오로지 나로만 가득 채우리라 다짐했지만
그래, 또 웃기게도 이 사람 저 사람이 완전하게 섞여버렸다.
첫 입주에는 밥솥이 필수라며 금보자기에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아르바이트 점장님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뜻한 음식만 먹으라며 손잡고 하이마트에 같이 가준 이모
언니 향긋한 차 좋아하니까 언제든 우려 마시라며 꽃무늬 티포트를 사준 S
앞으로 술술 잘 풀릴 거라며 휴지 뭉텅이를 주고 간 J
하루의 아침을 맑은 정신으로 시작하라고 커피 드리퍼를 건넨 Y
그래도 어두운 환경이 좋다면 따뜻한 빛이라도 비추라고 조명을 놓아준 P
밥을 제 때 챙겨 먹지 않는 날 알고 간단히 요리 해먹을 수 있는 에어 프라이기를 안겨준 M
사슴을 좋아하는 날 위해 깨끗한 도자기 오브제를 쥐어준 W.
색깔, 명도, 질감이 다 제 멋대로다.
그런 사람들이 조화롭게 숨 쉬는 내 공간을 애정한다.
그리고, 커튼은 달지 않는다.
이제는 환한 낮에 눈을 뜨면 당신들과 함께 햇빛을 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