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에서는 때 아닌 '집게 손가락' 논란이 한창이다. 논란의 요지는 '집게 손가락'을 묘사하는 그림이 '남성 혐오 표현'이라는 것이다. 집게 손가락 그림을 홍보물이나 광고물에 사용한 기업에게는 '남성 혐오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사죄하고 책임자를 징계하라는 요구가 가해진다. GS25, 르노코리아,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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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673606629052528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43409
위에서 언급한 대기업들은 불거진 논란에 '사과'로 대응했다. 자기들이 잘못을 했으니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맞나?'
처음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기업들의 사과에 깔린 전제는 '집게 손가락이 남성 혐오 표현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걸 알고도 사용한 직원들의 악의적인 잘못'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의아했다. 대체 언제부터 집게 손가락이 남성 혐오 표현이 되었으며 그걸 남성 혐오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기업 직원들이 있다니?
아무리 찾아봐도 집게 손가락 그림이 곧 남성 혐오 표현이라는 등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직 '그렇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인터넷 게시물과 댓글 뿐이었다. 근거는 빈약하고 미흡했다. 과거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에서 한국 남성의 성기 사이즈가 작다며 조롱하는 의미를 담은 일러스트가 집게 손가락 모양인 것 뿐이었다. 누군가 한국 남성의 성기 사이즈를 조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게 손가락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집게 손가락 모양의 그림까지 뭉뚱그려 '남성 혐오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걸까? 그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논리적 비약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여기서 문제는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을 펼치며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인터넷 사용자들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징징거림을 들어주고 달래주는 기업들이다. 대기업은 일반적인 개인을 훌쩍 뛰어넘는 명성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기업이 집게 손가락 논란을 빠르게 회피하기 위해서건, 문제를 제기하는 남성 그룹을 잠재적 소비자로 여기기 때문이건 어쨌건 간에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과를 함으로서 마치 집게 손가락 그림이 정말로 남성 혐오 표현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집게 손가락이 남성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처음 주장하기 시작했던 네티즌들에게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의 '사과'로 인해 '거봐 이거 진짜 남성 혐오 표현 맞다니까'라고 주장해도 된다는 근자감이 더 커져버린 것이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그런 결정을 하기 까지의 과정이 상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규모로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근력학교를 운영한지 1~2년차 쯤 되었을 때 비슷한 일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나는 고대 졸업생으로서 고대 인터넷 커뮤니티인 '고파스'에 졸업생 신분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고대 상권에서 운영 중이었던 '근력학교'를 홍보하는 글도 종종 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올린 게시물에 '남페미 보빨러가 고파스 한남 소굴이라고 조롱하더니 여기에 광고 올리네'라며 '근력학교 사장이 남페미다'라는 고발(?) 투의 댓글이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글은 고파스에서 가장 핫한 게시물이 되어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근력학교가 망하면 어떡하지?'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스카웃해와서 함께 일하고 있던 동료 선생님께도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만큼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만큼 기업은 외부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기업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근데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댓글창을 도배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면? 겁이 나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특히 대기업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논란의 성질을 파악하고 냉정한 대처를 하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아니었다. 할 수 있던 대응 중 최악이었다. 무책임의 극치였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 애초에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해 책임질 사람을 선택해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우르르 몰려 다니며 협박하고 날조하는 것밖에 하지 않은 집단을 상대로 '일단 납작 엎드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 폭력을 멈추라는 구호에 숨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백기를 들어버리는 것. 이게 그 기업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고대 상권 한복판에서 장사를 하던 나도 그러진 않았다. 고파스에 올린 광고를 보고 온 학부생, 대학원생분들을 생각하면 무섭고 떨렸지만 내가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때 했던 대응도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후회는 전혀 하지 않는다. 나는 이틀에 걸쳐 모든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내 주장을 알리고 설득하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이유, 남자가 페미니스트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 왜 그게 사회적 책임을 지는 훌륭한 방식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손을 벌벌 떨면서 키보드로 남겼다. 그때 격전지(?)가 되었던 글의 제목도 '저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맞습니다'라고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고파스에 다시는 홍보글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도 지키고 있다.
이 일화도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한심해보일 수 있지만, 나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하는 고파스 댓글들에게 면피용 사과나 납작 업드리기를 시전하고 싶진 않았다. 근력학교가 망할까봐 심장이 격하게 뛰는 와중에도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때 선을 한 번 넘었다면 내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도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과장된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에도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던 배경에는 여러 종류의 신념이 겹쳐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기업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이 그랬고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그랬다. 특히 피터 드러커는 기업의 목적이 단순한 이윤 창출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사회의 중요한 기관으로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경영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경영자적 마인드로 근력학교를 운영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근력학교의 서비스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세상에 이바지할 거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여성이 근력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으니까. 남성도 보디빌딩적 관점으로 헬스를 좁게 보는 것보다 스트렝스적 관점으로 넓은 인식을 갖는 것이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저 대기업들은 도대체 자신의 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길래 되도 않는 협박과 떼쓰기에 백기를 드는 식으로 대응하는 걸까? 애초에 기업의 존재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걸까? 단순히 이윤 추구 그 뿐인걸까? 그래서 이윤 추구에 해가 될까 두려워 황급히 백기를 내걸고 불부터 끄려고 했던 걸까?
이 모든 것이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극단적인 폭력의 방향과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흐름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개혁이나 혁명 뿐만 아니라 눈앞의 문제를 대하는 개개인 또는 집단의 태도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소위 '대기업'들의 한심하기 그지 없는 대처가 주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