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이 노벨상을 받으신 뒤 이것저것 보고 읽으며 하게 된 생각.
나는 내가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윤리적인 편에 가깝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며칠 간 여러 글을 읽고 영상을 보며 문득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윤리적인 고민을 종종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도망쳐 간 곳이었다. 일상에서 윤리적인 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직시하고 싶지 않을 때, 그렇지만 윤리적이고 싶은 욕구를 충족해야 할 때, 쉽게 도망쳐 들어갈 수 있는 은신처이자 휴양지였다.
윤리적인 삶에 대해 많이 고민했지만 실제로 행한 것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순간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 온 편이다. 스스로를 직시하지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놓지 않고 삶과 이어붙이려 하지도 않았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 과정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그것이 피부에 닿기만 해도 눈쌀을 찌푸리며 한 없이 미루기만 하는 사람 같았다.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뾰족한 바늘처럼 무섭고 버거워서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면서 가끔씩 안락한 의자에 앉아 머리 속으로 윤리와 정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거기에는 고통과 어려움 대신 만족감과 즐거움이 있었다.
스스로를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질이 그렇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실은 적극적으로 둔해지려고 노력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책임과 윤리에 대해 고민하고 실제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일상을 그것들로 채워나가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을 기질적인 둔감함으로 포장했던 것일까?
이 질문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서는 직시하는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불편하고 하기 싫은 것들을 미루거나 외면하지 않는 방식으로서의 윤리가 필요하다. 일상 속 실천과 행동으로서의 윤리가 필요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에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항상 주류에 속하고 싶었고, 거기서 내쳐지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필요한 윤리와 철학이 소외된 주변부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거기에 속하고 싶진 않았다. 소수자/약자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확실히 그렇게 되는 건 두려웠다. 내가 원하는 건 적당히 발을 걸치고 있는 포지션이었다. 지적으로 자극적인 신선한 생각을 접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의 중심에 최대한 가깝게 붙어서 위태롭지 않은 삶을 원했다. 중심에서 멀어지는 상상만 해도 내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딜 가든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 염려하며 눈치를 많이 보는 내가 주변부의 삶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심부의 삶을 세게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긴장 상태의 나와 윤리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나는 애초에 양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중심부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면 나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강제로 튕겨내질 지언정 스스로 걸어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게으르다. 경험 상 게으르면 윤리적이기 어렵다. 책임을 다 하기도 어렵다. 윤리는 인류 전체나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소비되어선 안 되고 가족/친구/동료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일상적 차원에서도 지켜져야 하는데, 게으른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다. 약속을 어기고, 요리하지 않고 배달시켜 먹으며, 할 일을 미룬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윤리적으로 살려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약속을 지키고, 요리해먹고, 아끼고, 미루지 않는 부지런함. 주류나 중심부에 속해야 한다는 긴장을 내려 놓는 것. 회피하지 않는 것. 직시하는 것. 힘들더라도 일상을 부지런히 꾸리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점점 더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둔해지지 않는 것.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삶이 꼭 안온하고 풍요로워야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는 것.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것.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인공으로 사는 데 집착하지 않고 싶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다시 회피하고 미룰까봐 걱정도 된다. 지금 가진 생각이 단기간에 소모,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불안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