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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선이 Apr 25. 2024

청담동에서 쫓겨난 트레이너

트레이너 노동 4편 중 2편

    부당한 근로 조건에서 비롯된 억울함 '청담동은 부자들의 공간이고 나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자기 인식이 합쳐지면서 나는 차츰 비뚤어졌다. 내가 없어 보이진 않는지, 이 공간에 안 어울려 보이진 않는지 눈치를 봤다.


    비싼 옷이나 파인다이닝 외식처럼 보여지는 것과 (내 기준) 사치스러운 문화생활에도 집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벌이로는 지속할 수 없는 소비였다. 예상보다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는 잔고를 보면서 이유 모를 초조함에 더해 억울함까지 느꼈다.


    한 달에 25일 이상 헬스장에 있으면서 비싼 돈을 내고 PT를 받는 사람들, 청담동 주민인 것 같은 사람들을 보고 부러움과 선망, 열등감을 키워나갔다. 소문에 따르면 누구는 자산이 500억에 차가 종류별로 네대라고 했고, 내가 가르치던 대학생 회원은 다이어트 목표를 달성하면 부모님이 천만 원을 준다고 했다. 유명한 연예인 회원부터 기업 회장, 유명 호텔 소유주도 있었다. 나는 이들을 평범하게 보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평소에 성실하고 친절해서라며 추석 선물로 10만 원을 선물하는 회원의 덕담을 들으면서도 질투 같은 것을 느꼈다.


    평소처럼 새벽 6시에 센터 문을 열고 인포 데스크에 앉아 7시 수업 회원을 기다리며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회원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 시간에는 나밖에 없다는 생각, 내가 수업료를 챙겨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료 정산도 부당하고 협상도 안 되는 사장을 상대로 내가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감쪽같았다. 하지만 기간이 길어지고 금액이 쌓이면 회사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또 헬스장도 일종의 작은 사회라서 말이 돌고 소문이 퍼진다. 사장님 또는 다른 직원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느 날 조용히 사장님께 불려 갔다. 대화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당황과 곤혹스러움, 죄의식과 수치심이 뒤섞이는 바람에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왜 그랬는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일은 정리해야 했다. 일주일 정도 신변정리 기한을 받았는데, 그 기간이 오히려 힘들었다. 눈치로 보아 다른 직원들도 이유를 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소에 내 조건이 부당하다며 편을 들어준 동료라도 죄를 지은 나까지 위로해 줄 순 없었다.


    벌금도 내야 했다. 모아둔 돈은 당연히 없었다. 부모님께도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친구와 형들에게 돈을 빌렸다. 당시로서는 크게 느껴지는 금액이었다. 빌리면서도 이유를 정확히 말하지 못해 미안했고, 빨리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죄라는 걸 짓고 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잃게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게 되는지 배웠다. 단순히 내가 죄를 짓고 회사가 피해를 입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받았던 부당한 처우를 말할 기회도 잃었고,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제삼자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줬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일자리를 잃고 빚을 얻은 채로 덩그러니 남았다. 직후에는 왠지 무서웠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막연한 공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무서운 게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착한 줄만 알았다. 살림살이는 빠듯해도 정직한 부모님 밑에서 인성 하나는 잘 배웠다고 자부했다. 그 자부심을 주춧돌 삼아 다른 자존감을 쌓아 올려서 만들어 낸 게 '나'였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처음 본 내 모습이 그 믿음을 와르르 무너뜨린 것이었다. 폐허에 남은 건 '죄를 지은 나'에 대한 혐오와 의심이었다. 나는 돈밖에 모르는 나쁜 놈인 걸까? 앞으로도 그런 놈으로 남게 될까?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소모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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