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배운 것들, 보고 느끼고 즐긴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한 모든 감상과 후기를 블로그에 꼭 남기는 편이다.왜냐하면 내 기억력은 정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즉,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 남기지 않으면 분명 미래의 나는 '그때 내가 뭘 보고 들었더라?' 하며 과거의 나를 탓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만은 어떤 후기도, 내용 정리도 할 수 없었다. 영화에 대한 평이 크게 갈리는 편이었다.
난해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vs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이런 영화평을 보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빠져들게 되었는데, 포뇨가 나왔을 때는 개봉일 다음날인가,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내용, 그림체, ost, 캐릭터, 그 모든 것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 대해 나는 '난해함' 쪽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면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가.
도저히 영화 속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뭔가 장치도 되게 많고, 이야기도 엄청 많은데, 저거에 대한 얘기는 왜 안 풀고 넘어가지? 저 캐릭터가 가진 의미는 뭔데, 그냥 넘어가지? 이런 것들이 아주 많았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제목에 대해 고민했다.
우리의 삶도 사실 주어진 대로, 닥치는 대로 그에 대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 어떤 일이 어떻게 닥칠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주인공은 뜬금없는 상황에 계속 직면한다. 그래도, 그걸 어떻게든 헤쳐나간다. 그리고, 살아서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 모습이 불행이 들이닥쳤을 때, 우리의 삶과 비슷한 모습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신은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할 때 죽게 되는 거라고 한다. 그러니, 불행을 견디고 지금 살아있다는 건, 신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행 중에도 작게나마 구원의 순간들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위기에 닥쳐, 빠져나오지 못할 때마다 구원의 손길이 주어진다.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듯, 우리의 삶도 계속 스토리를 써 내려갈 테니까.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반의 적인 표현을 드러내는 듯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간다.'라는 해석이 나온 이유는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전작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방작원에서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보며, 이건 도대체 뭔가? 싶었다. 몽환적인 세계가 이어지는데, 알고 보니 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합평 때 질문이 폭격기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방어도 상당했다. 스토리에 담긴 의미도 꽤 길었고, 시나리오 속 소재들도 왜 그게 그렇게 쓰였는지 작가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길었다.
"작가의 머릿속에만 모든 게 있어."
그걸 듣고 있던 선생님이 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시나리오에 담았어야지."
이번 작품을 보면서 선생님이 마지막에 했던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이 업계를 모르는 사람은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혹평을 들을 만한 작품을 내놓았을까 고심했다.
생각해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을 대비시키면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찐 팬은 아닌 모양인 듯)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운명에 순응해서 따라간다는 말도 맞고, 그냥 주워진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것도 맞는 말일 테다. 근데 나는 그의 작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했던 모든 행적이 미래를 만들어낸다.'
결국, 미래의 '나'는 과거에 내가 가진 생각, 행동, 추구하던 이념 등이 모여 이루어지고, 운명이라는 길도, 닥칠 상황도 과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