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함께 갈 것 같았던 사람도 말 한마디로 그 관계가 끊어지기도 한다. 한편,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각오했던 원수 같은 인간도 다시 마주하게 될 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단 하나를 꼭 집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인연(因緣)'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것도, 끊어지는 것도 모두 물 흘러가듯 흐름에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은 단지 사람관계에서만 있는 건 아닌 듯싶다. 웹소설의 캐릭터와 작가인 나의 관계도 그런 인연이 있는 듯싶다.
머릿속에서 주구장창 나를 괴롭히며 골치 아프게 했던 캐릭터도, 사건도, 어느 순간 끝나고 바이바이 하게 된다. 글을 한창 쓸 때는 평생 갈 것 같았던 기세였는데, 완결을 내고 수정을 마치고, 세상에 그 작품이 드러나게 되면 나와 캐릭터는 웬만해서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
내가 낳았지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공력을 쏟아부었으니 잘되고 못 되는 건 이제 신의 뜻에 달려 있다. 그게 나와 캐릭터와의 인연이다.
반면, 다시는 안 보겠노라 다짐했던 캐릭터를 다시 만날 때가 있다.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리메이크. 나머지 하나는 대본화다.
칸의 여자는 19살에 썼던 소설이었다. 그런데 출판사와 얘기래서 리메이크했다. 그리고 29살에 출간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난 캐릭터는 이미 익숙해져서일까, 글을 쓰는 게 새로운 이야기를 쓸 때보다 몇 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그 소설을 '아홉수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을 쓰면서 나는 누군가와 사귀다 헤어졌을 때 왜 다시 안 만나는지 알 것 같았다. 헤어진 연인은 똑같은 이유로 헤어진다는 말처럼,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면서 나는 처음에 이 작품을 썼을 때 느낀 고통을 또다시 느껴야 했다. 하지만 어쩌랴. 칸의 여자라는 작품 속 캐릭터들이 그때의 나와 연이 닿아있는 것을 거스를 수 있을까.
최근에는 웹소설로 썼던 작품 하나를 대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영상화된 건 아니고, 대본 쓰는 연습을 위해서 공부 중이다) 그런데 글을 쓸 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떠나보낸 캐릭터들을 다시 만나니까... 뭐랄까, 치고받고 그렇게 욕하던 원수들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또다시 싸우면서 써야지, 어쩌겠는가.
캐릭터와의 관계도 시절인연이라는 걸 종종 느낀다. 그래서 작품을 쓸 때는 정말 모든 총력을 기울여서 캐릭터와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다시 만나면 미우면서도 반갑고, 다시는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아쉬움이 없다.
그걸 느끼며 인간관계도, 하는 일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럼 지나간 인연도 시절인연이라고 여기며 과거를 떠올렸을 때 웃을 수 있고, 지급 현재도 시절인연이라고 생각하면 내 모든 걸 쏟아부어 아쉬움 없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