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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khokwon Jan 22. 2020

동물병원 에세이, 북한인 2편

같이 사는 이야기

북한 사람을 경험하고 난 뒤, 북한도 여느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 인식을 이루는 경험에 기반한다. 부모세대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겼었다. 이른바 적색 증후군에 노출될 만하다. 반면 젊은 세대는 교육과 정치적인 수단으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무관심으로 일축한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각자 너무 다른 인식의 틀 안에서 북한은 과연 북한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각자의 경험적 틀 과 관심에 따라 북한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 눈에 비치는 북한과, 탈북자의 눈에 비치는 북한, 트럼프의 눈에 비치는 북한,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의 눈에 비치는 북한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각자 쌓아온 경험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 비친 북한의 모습이 정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두번째 북한인 이야기다.


캘리포니아에는 동양인이 많이 산다지만 그것도 지역마다 편차가 크다. 내가 임상을 했던 지역은 백인과 남미계 라티노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혹여 가끔 찾아오는 동양인들은 일본인 혹은 중국인들이었다. 10월쯤이었나, 아마 가을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콧잔등이 유독 까만 샴 고양이를 데리고 한 젊은 여자가 병원을 찾아왔다.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꽤나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이나 한국과 같은 북방계 민족이라는 어림짐작은 했다. 상담실에 들어가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내 이름을 밝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나에게 한국말로 되묻는것이 아닌가.

“권이면 남한 사람입네까?”

앗 북한 사람이다. 뇌에 영어모드를 끄고 오랜만에 한국말을 꺼냈다. 사실 매번 영어를 사용하다보니 한국말로 수의학 상담을 하는게 오히려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의학용어는 항상 그대로 이야기하다 한국말로 풀어서 설명하려다보니 애를 먹었다. 두가지 언어를 다 잃는 다는 것이 이런것이군.


고양이 이름도 북한 말로 지을 줄 알았는데 니나라고 했다. 아주 미국적인 이름이었다. 보호자는 니나를 키운지 5년 정도 되었고 얼마 전 로스 앤젤레스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니나에게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어렸을때부터 귀지가 심했고 귀를 자주 긁었다. 그리고 만성 외이염으로 발전을 했다. 몇가지를 문진하다보니 식이 알러지가 강력하게 의심되었다. 너무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급여하고 있었고 생선이 들어있는 습식사료를 주사료로 너무 자주 급여하고 있었다. 몇가지 약을 처방하고 식이에 대한 처방을 내려주었다. 얼마 후 다행히 임상증상은 사그라 들었다. 식이 알러지에 대한 치료는 전적으로 보호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내가 요청한 사항을 몇 개월 동안 실천한 보호자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반려동물에게 간식을 그동안 한번도 안 줄수가 있지?


그 다음해 봄 쯤, 니나와 보호자는 다시 병원을 찾아왔다. 미국 동물병원은 대부분 예약을 하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예약 없이 워크인 (Walk-in)으로 찾아왔다. 니나가 화장실에서 끙끙거리면서 소변을 누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어제부터 피오줌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몇 가지 검사를 통해 꽤 큰 결석이 방광에서 발견되었다. 엑스레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초음파로 확인해야 하는 요산염결석으로 의심되었고 결석 크기가 꽤 컸기 때문에 수술을 해서 제거해야 했다. 보호자는 흔쾌히 수술을 수락했고 큰 문제 없이 결석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호흡 마취 기계를 끄고 기관지 삽관 튜브를 빼자마자 아무일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좌우를 쳐다보더니 일어났다. 너무 마취에서 부드럽게 일어나서 놀랄 노자였다. 다음날 수술경과를 설명하기 위해 보호자가 내원을 했다. 마침 다음 시간 예약이 없어 좀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역시 보통 반려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슴없이 털어놓는 것을 보면서 의지할 곳이 참 없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보호자가 니나를 만난 건 5년 전이다. 하지만 이 보호자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이해를 제대로 하려면 9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니나 보호자는 부모님 그리고 오빠 한명과 북한의 삼지연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북한 최북단에 위치한 삼지연은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 곳으로 백두산 자락에 있었다. 국경 시골 마을이다 보니 항상 먹거리는 부족했다. 보호자의 가족들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 사람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비극이 발생했다. 부엌에서 엄마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대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집에 있다 보면 엄마가 죽는 모습이 비디오가 리플레이 되는것처럼 되감기기 시작했다.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고, 엄마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아붙인 원인이 독재 김씨일가들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 뒤부터는 무작정 탈북을 시도했다. 삼지연은 중국이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오빠와 함께 3번 강을 헤엄쳐 탈북을 시도했지만 모두 국경수비대에게 적발되었다. 남자의 경우는 탈북을 시도하다가 끌려오면 봐주는 경우가 없었다. 최소 6개월동안 교화소에 끌려갔다 와야한다. 오빠는 교화소 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가족들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자와는 다르게 여자는 몇 번 봐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런 경우 국경수비대에서는 여자에게 사정을 봐주는 대신 대가성 성매매를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세번째 잡혔을 때는 더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나보다. 여자는 아오지 탄광촌으로 끌려갔다. 보통 한국에서 들어본 아오지 탄광은 중대한 정치범들이 끌려간 뒤 가혹한 노동을 하면서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종래에는 시체로 나와야 하는 수용소라는 이미지로 존재한다. 하지만 아오지 탄광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로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과 조금은 달랐다. 탄광을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마을에 필요한 각자의 역할을 나눠 수용자들이 하나씩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니나 보호자가 받은 교화형은 1년동안 돼지농장에서 돼지 100마리를 돌보는 일이었다. 정말 힘들었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도 일이지만, 수용소 안에서 교도관들이나 제소자들 사이에 성폭행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떨리는 눈빛을 보니 참혹했던 상황이 그려졌다. 솔직하게 니나 보호자도 피해자 중 한명 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쳤다.


1년간의 돼지농장 생활 이후, 천지연으로 돌아왔지만 엄마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 간절해진 탈북에 대한 염원에 힘입어 네번째 탈북은 성공이었다. 한밤에 물이 제일 줄어든 날을 선택해서 강을 건넌 뒤에 미친년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정처없이 달리던 여자는 숲 안에서 이틀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주변을 돌아보던 중 마침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나는 곳을 무작정 찾아갔더니 중국인 벌목공들이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 후로 무작정 그 사람들을 따라갔다.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에, 벌목공들이 나무를 해와서 장작을 패면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하루에 한국돈으로 대략 4천5백원 정도를 받으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돼지농장보다는 나았지만 이것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이것 이외에 더 나은 일이 있는지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여자들이 체력적인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보니 미장이 일을 배우게 되었다. 미장이 일이 손에 익게 되면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문제는 불법 체류자였기 때문에 중국 공안에게 걸리면 북한으로 다시 강제송환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늘상 불안했다. 탈북자들 커뮤니티를 통해서 유럽이나 미국에 난민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미국으로 난민 신청을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가려면 위험했기 때문에 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난민신청을 하기 위해 태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태국을 비자 없이 입국하려면 육로에 있는 국경 이민심사관에게 10,000바트 (한화로 대략 40만원)을 주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태국에서 장장 2년이라는 시간 끝에 미국에서 난민 지위가 인정 되었고 지체없이 모아놓은 돈을 털어 방콕에서 미국 애리조나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영어도 아예 할 줄 모르고, 아는 사람도 한명 없는 미국땅에 도착부터 직장을 잡을 때 도움을 받은 곳은 한국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한 커뮤니티였다. 교회에 나가면서 치킨집을 하는 사장님이 서빙직을 제안했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치킨집 근처에는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길냥이들이 와서 자주 머물다 가고는 했는데 그 중 한 고양이가 유독 자기를 따랐다. 밥을 주러 나오면 다리에 자기 머리를 슥 비비고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부리고는 했다. 반려동물을 키워본적은 없지만 매일 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외롭기도 했고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다보니 다른 사람 별채에 얹혀살면서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에 와서 첫번째 삶의 목표가 생겼다. 오롯히 자기방을 구하기 전까지 고양이가 치킨집 근처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부지런히 밥을 주었다. 몇번의 월급을 받고 나서 혼자 살 수 있는 원룸을 하나 빌렸고 고양이 한마리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그 고양이가 니나였다.


자기가 고양이를 키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북한의 반려동물 문화는 없다고 말하는게 맞을 정도로 열악하기 때문에 반려동물에 대한 경험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사하는 마당에 반려동물을 키울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다. 만약 키운다면 대형견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나중에 어느 정도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서이다. 북한의 중학교 방학숙제 중 하나는 짐승의 털을 벗겨서 제출하는 것이라 하는데 개나 고양이도 포함이 된다고 했다. 특히 고양이는 아무도 키우지 않는데 길냥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나 야생동물에 의해 사냥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애리조나에서 열심히 몇년을 일했다. 치킨집 사업은 날로 확장이 되었고 고용주의 신뢰도 얻게 되었다. 사업 확장을 위해 캘리포니아 최남단에 있는 샌디에이고에 치킨집을 차렸고 치킨집 사장님은 새로 생긴 가게의 점장으로 니나 보호자를 임명했다. 고양이와 함께 애리조나에서 샌디에이고로 이동을 하는 순간이 최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한다.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느낌과 함께 좋아하는 니나와 또 다른 여행을 한다는 기분. 그 후 샌디에이고의 치킨집에 대략 3년 정도 일을 했고, 지금은 1년 정도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도 있는 중이라고 했다. 고작 27살에 이 모든 것을 경험했다니, 믿겨지는가? 개인의 역치에 따라서 느끼는 부담감이나 중압감의 정도는 다 다르겠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되다. 기쁜 일보다는 힘든 일이 많다. 하지만 니나 보호자를 보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던 내 삶을 반성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손님이 뒤에 밀려있으면 매니저가 빨리 상담을 끝내라는 사인을 보낸다. 문을 톡톡 그리고 톡 세번 두드리는데 그날은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1시간이 넘는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거의 듣는 편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마지막으로 미국이 좋냐는 질문을 던졌다. 품안에서 잠든 니나를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보호자는 곧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을 했다.


“아니요. 제 목표는 여기서 빨리 20만불 벌어서 10만불로 중국 장백에 집 사고 중국 시민권 얻고, 나머지 돈으로 아빠랑 오빠랑 종종 중국으로 초대해서 얼굴 보고, 고양이랑 행복하게 사는 것이에요”


나도 동의했다. 사람의 행복은 누구와 함께 있고, 무슨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나만의 가설이 증명된 셈이다. 가족들을 중국으로 어떻게 초대하냐고 물었더니, 북한에서 중국으로 완전히 이주는 힘들어도 국경 수비대에게 대략 200만원 정도를 주면 일정 기간 동안 중국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고 한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야, 혼자 되뇌었다.


대화를 하면서 조선시대에 썼을 법한 단어들, 예컨대 팔척장신이라는 단어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신기했고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름에도, 의사소통에 전혀 오해는 없었다. 앞으로 또 다른 50년이 지나면 갈수록 의사소통이 힘들어 질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보호자는 ‘돼지 같은 욕심덩어리 김씨 3부자’들을 연신 욕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족들과 재회할 날을 기다리며 먼 이국땅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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