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1 게임과 삶의 연대기_세모문 뉴스레터
‘혹시 게임 하세요?’ 소개팅 자리에서 해서는 안 되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 아주 가능성이 낮은 질문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게임을 해왔고,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게임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택한 사람으로서, 게임을 빼고 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어렵기에 상대방에게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보통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고, 그러면 그 소개팅은 보통 잘 되지 않았다. 이는 온라인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데이팅 앱에 ‘술, 담배, 게임하시는 분은 정중하게 패스해달라’는 상대방의 자기소개글을 보면서, 혹시 도박을 게임으로 잘못 쓰신 것 아닌가 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영화보기, 음악 듣기, 각종 스포츠는 늘 취미로 등장하지만, 게임을 한다는 취미는 거의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한다. 정확히는 게임을 기획(Design)한다. 내 주변에는 비슷한 부류의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소셜 서클을 벗어나면 아직까지 꽤 독특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으레 그런 관심은 몇몇 우호적인 편견(돈 많이 벌겠다, 천재 아니냐)을 담은 질문으로 이어지고는 하지만, 사실 살아오면서 듣기 싫은 편견을 마주할 때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이 함께 써야 할 TV를 점유하며 ‘전자오락’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뭔가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고, 게임에 푹 빠져있다 퇴근하는 아빠에게 인사를 제대로 안 해서 혼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형태야 달라졌지만 여전히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아이들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게임하는 시간을 규제하려는 부모님의 시선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더욱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며,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시간낭비를 조장하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디지털 ‘중독 물질’을 만드는 마약 제조상처럼 보는 기성세대의 시선도 아직까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2020년 초, 세계 보건기구(WHO)의 게임 중독 질병화 코드 등재가 이루어지고, 공중파 방송에서 게임을 ‘중독물질’로 보는 패널들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해왔고,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게임이 공개적으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자괴감, 나는 저런 게임을 만들지 않았는데 한 번에 싸잡아 욕을 먹는 데에 대한 억울함, 정작 그런 게임을 만들어서 많은 돈을 벌고 있는 회사들은 입을 싹 닫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 사건은 같은 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5관왕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게임과 영화라는 매체 사이의 간극이 더욱 극명하게 대비됐다. 아마 게임업계 외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체감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온라인 상에서 ‘게임은 (중독물질이 아니라) 문화다’라는 슬로건을 미는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사회의 비난에 정당성을 주는 확률형 아이템과 사행성으로 점철된 게임들이 모바일 게임 시장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속에서 ‘게임은 문화다’라는 주장은 왠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물론 게임이 문화적인 산물이기는 하지만 이는 너무 모호한 말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문화가 아닌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그렇다면 대체 게임이란 뭘까? 보통 게임이라 하면 비디오 게임,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이 하는 모바일, 온라인, 액션 RPG(롤플레잉 게임) 등 특정 장르의 게임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게임들이 잘하는 중독적인 게임 메커니즘의 설계, 확률형 아이템 등으로 유저의 돈을 쥐어짜 내는데 특화된 BM(비즈니스 모델) 등이 마치 게임의 특성인 듯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게임의 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다. 유명한 게임 디자인 교과서 중 하나인 <Rules of Play>에서 말하는 게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게임은 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갈등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며, 측량 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시스템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게임의 본질에 대해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이 정의에 따르면, 카드게임, 비디오 게임, 스포츠 등 게임을 플레이하는 형태나, 중독성, (확률형) 아이템 등은 게임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바둑, 포커 등 모든 보드게임, 가위바위보에서부터 클라이밍까지 몸으로 하는 게임과 모든 스포츠, 모바일 게임에서부터 가상현실 게임까지 모든 비디오 게임도 물론 게임의 범주에 속한다.
아마도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자기가 게임 만든다고 게임을 변호하려나 보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몇 예를 들며 ‘이런이런 작품성 있는 좋은 게임도 있다, 그러니 게임은 좋은 것이고, 문화이고, 예술이다’ 등의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작품성 있는 게임만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습관적으로 늘 하던 게임만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장르 편식도 있어서, 양산형 모바일 게임은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게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뭐라고 말할 자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 어린 시절, 8비트 게임기 닌텐도 패미콤에서부터 지금의 VR기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게임을 플레이해왔고, 게임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친구를 사귀고, 업으로 삼기까지 한 사람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해 할 이야기는 충분히 있을 것 같다.
게임은 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매체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 연재 시리즈에서 어릴 적 플레이한 게임들과, 게임을 만드는 일이 어떻게 내 삶에 영향을 미쳐왔고, 앞으로 어떤 게임 개발자의 모습을 꿈꾸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어쩌면 누군가 아직도 가지고 있을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