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1 게임과 삶의 연대기_세모문 뉴스레터
아빠에게 박살난 패미콤 게임기 이후 집에 생긴 생애 첫 486 컴퓨터가 새로운 게임기가 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 처음 컴퓨터를 맞추면 각종 게임을 깔아주는 것은 관행이었다. 이전 글의 <듄2>를 포함해서 그때 처음 접한 20여 종의 불법복제 게임들은, 1주일 만에 컴퓨터를 유익한 생산성 기계에서 비디오 게임 머신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당시 게임기에 비해 떨어지는 성능에 조악한 그래픽, 사운드카드도 없이, PC 내부 스피커의 거친 ‘삑’하는 소리만으로 게임을 하기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게임을 소개하는 방송에서 한 게임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640x480의 높은 해상도의 그래픽, 자연스러운 캐릭터의 움직임과 화려한 마법 이펙트, 음산한 분위기의 음악은 충격 그 자체였다. <디아블로>라는 이름의 그 게임은, 당시 명작 RTS(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만든 <블리자드>라는 회사의 신작이었다. ‘어머, 이건 해봐야 해’라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 첫 게임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장벽이 있었다. 일단 게임 자체가 문제였다. <디아블로>라는 이름은 ‘악마’라는 뜻의 스페인어였고, 불길에 타오르는 시뻘건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이 떡하니 박혀있는 게임을 사달라고 하는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 우리 집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컴퓨터의 성능 또한 문제였다. PC 성능은 해가 거듭할수록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게임은 늘 그 최전선에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몇 해 전에 산 DOS 운영체제 기반의 486 컴퓨터는 빠르게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디아블로>는 새로 나온 <윈도>라는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했고, <윈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PC를 새로 사거나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당시 돈으로 약 10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중학생 신분에 그런 돈이 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윈도>라는 것이 게임 말고 마나 다른 “유익한” 것들도 할 수 있는지로 아빠를 설득해야 했다.
결국 어찌어찌 계획은 성공했고, 새 컴퓨터가 생겼다. 너무 신난 나는 그날 일기에 “새 컴퓨터를 사서 너무 기쁘다. 이제 <디아블로>를 할 수 있다”라고 적었는데, 언젠가 아빠가 그것을 읽은 사실을 알고 머쓱했던 기억이 있다. (방학 일기를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고, 그걸 부모님이 검사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다행히 일부러 모른 척하신 것인지 별 탈이 없이 <디아블로>를 포함한 추후 인생 게임이 될 수많은 최신 윈도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디아블로> 시리즈와 함께 수많은 대한민국 청년의 인생을 빨아들이고, 획일화된 취향, 또는 공통된 추억을 만들어준 그 게임이 출시된다.
<스타크래프트>는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다지 인기 없는 <KKND>라는 게임을 한다고 놀림받고, 당시 게임 잡지에서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 명작 RTS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혼자 플레이했다. 하지만 온 학교 친구들이 다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판에, 즐거운 학창 생활을 위해서 나 역시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다. 이후 중학교 시절 동안 방과 후 3:3 반 대항전을 하며 전교를 휩쓸고 다니고, 각 학교에서 스타짱을 먹는 (=스타를 가장 잘하는) 형들과 길드를 만들어 베틀넷에서 온갖 엽기, 농락 플레이를 하며 양민을 학살하는 (=초보 게이머들을 괴롭히는)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OO 중 스타짱 김종화”라고 베틀넷 채널에 도배하는 자의식 과잉의 중2였다. (사실 좀 하기는 했다. 딱 동네 PC방을 주름잡을 정도로.)
그렇게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종종 밤샘까지 하던 어느 날, 하교 후 PC의 키보드가 선이 끊긴 채 욕조에 고이 잠겨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맨날 게임만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더 못 보시겠던지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황당했지만 다행히 본체를 건드리지 않으셨기에, 나는 키보드를 물에서 건져 말리고, 배선을 연결해서 살려내고 게임을 플레이했다. 이쯤 되자 엄마는 포기하셨는지 게임만 하지 말고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하셨다. 처음 든 생각은 “그거 괜찮겠는데?”였다. 어릴 적부터 가장 많이 한 일이라고는 레고 만들기와 비디오 게임이기에, 게임을 만든다는 일은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게임 개발자라는 직업은 생소하기도 했지만 배고프기로 유명한 직업이었다. 매일 라면 먹고 철야하며 게임을 만드는 1세대 개발자의 이야기가 생생한 현실인 때였으니 말이다. 나는 뭐든 그 분야의 최고가 되라는 당시의 분위기, 최고라면 뭘 하든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 그리고 중2 특유의 근자감으로 “세계 최고의 게임 디자이너”(여기서 게임 디자이너는 기획자를 말한다.)라는 꿈을 정해 버렸다. 교회 수련회에서 20년 후의 모습을 블리자드의 수석 게임 디자이너로 적기도 했다. 그렇게 부모님 속을 썩이던 겜돌이는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