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사실 얼마 전에 집을 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이다. 집을 사겠다고 완전히 마음먹고 가서 산 것도 아니었다. 몇 주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그냥 괜찮아 보이는 동네에 적당히 무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깔끔한 아파트를 ‘보기만’ 하러 갔다. 마음에 들었지만 당장 살 생각까지는 없어서 돌아가려던 찰나, 부동산에 싸게 나온 급매물을 계약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름 싸게 잘 샀다고 볼 수도 있겠고, 부동산업자의 현란한 상술에 넘어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덜컥 질러 버린 이후로 잘한 짓인가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주위 몇몇 친구들 외에는 알리지 않았다. 친구에 따라 어차피 실거주할 집 한 채는 필요하니 잘 샀다고도 하고, 어쨌든 집값은 오를 거라고도, 한동안 집값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굳이 지금 매매를 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월세로 살고 있는 1.5룸도 가격 대비 나쁘진 않고, 원하면 얼마든지 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오래된 빌라지만, 어쨌든 (그놈에) 강남 한복판에서 누릴 수 있는 인프라는 다 누릴 수 있었고, 고급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도시 뷰도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집에서 바퀴벌레(자그마한 독일바퀴 말고 검지만 한 미국바퀴) 시체가 나오기도 했고, 나도 좀 이제 깨끗한 새집에서 살고 싶었고, 도시 한복판보다 자연과 가까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기도 했다. 당첨 가망 없는 청약 점수도 이유지만, 저마다의 삶을 점수화시키는 국가적 뽑기 시스템에 목메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떨어지는 현금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지만, 그런 불안감을 계속 부추기는 목소리에 영향을 받은 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일들이 잘 풀릴 것이라 가정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확실히 집을 사기 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많은 일들에 더 예민해졌다. 적당히 정리하려고 했던 주식은 연일 하락 소식에 기약 없는 강제 장투로 가고 있고, 제때 환전하지 못한 엔화의 가치는 근 20년 내 최저로 떨어졌으며, 일찍 결정 날 것 같던 다음 직장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대출을 받아야 할 텐데, 미국 연준인지 뭔지에서 계속 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잠재적 이자부담도 높아졌다. 가만히 현금을 들고 있었다면 최소한 그만큼 예금 수익이 됐을 텐데, 내지도 않아도 될 이자를 내야 한다니 속이 쓰렸다. 집을 가지지 않았을 때는 집값이 내려가기를 바랐으면서, 집을 사고 나니 다들 망하기를 바라는 듯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댓글이 신경을 긁었다.
안 좋은 생각에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현재에 집중해도 모자랄 내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보지 않아야겠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가끔 같은 아파트 단지의 같은 평수의 시세를 확인하고 (다행히 아직까지 근 1년 내 기준 싸게 산 편이긴 하다), 보지도 않던 부동산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부동산 관련 책을 (이제야) 읽어보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학습된 유튜브는 또 아파트값이 오른다니, 내린다니 저마다의 주장을 펴는 ‘전문가’들의 영상을 내게 추천했고, 좋으나 싫으나 영상 제목만 봐도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지금은 관련 영상을 차단했다) 이 때문인지 잠도 잘 오지 않아 약을 먹어야 잘 수 있게 되고, 예민해져서 주위 소중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기도 했다. 확실히, 집을 사기 전보다 후에 불행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현재와 근 미래의 자유를 담보로 이 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 페북을 봐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누구 부럽지 않게 자유롭게 여기저기 쏘다니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아온 내가, 좋든 싫든 앞으로 한동안 대출금을 갚기 위해 매달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동안 내가 살며 만들어야 할 작품들이 멀어지는 것 아닌가, 그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에서 자꾸만 꿈틀거린다. 그냥 손해를 보더라도 없던 일로 다 정리해버리고,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온전히 내 작품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저 또 다른 합리화할 이유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오랜만에 서울에 온 엄마랑 함께 다시 한번 그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기존 세입자가 있어 입주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다.) 정말 그때 나는 부동산의 꾐에 넘어가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 다행히 아주 터무니없는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봐도 근처에 산과 호수가 있으면서 도심까지 그리 멀지 않고, 약간 촌스러움이 남아있지만 오래된 맛집과 전통시장이 있으며, 나름 신축이지만 너무 겉멋만 들고 비싼 새 가게밖에 없는 신도시는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뒷산에서는 부산에서 하던 것처럼 이것저것 채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부산 외곽에 신도시와 구 시가지 사이에 있는 우리 집이랑 여러 모로 비슷한 면이 있고, 그래서 좀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반응만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생각을 혼자 가지고 있는 것보다 글로 남기고 누군가와 공유했을 때 해소가 되는 부분이 있음을 몇 안 되는 글을 써보며 체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누구든 저마다 삶의 짐을 지고 있을 것이고, 그에 비하면 내가 살짝 지게 될 짐의 무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너무 자유로운 것보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해야 지금을 덜 놓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