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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화 Feb 14. 2022

7000년에 한 번

2020.08.01 태백에서 혜성을 처음 본 날의 기록

  혜성이 다가오고 있다. 7000년에 한 번 보이는 혜성이라고 한다. 며칠 전부터 SNS가 떠들썩하고 누군가가 촬영한 멋진 사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나름 천문학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혜성이라고는 어릴 적 책에서 본 핼리혜성 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마저 사진으로만 봤기에 혜성이라는 것이 실제로 밤하늘에서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얼마나 밝은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에 대한 감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뉴스를 보니 이번 주가 관측하기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이후에는 점점 밝기가 줄어들고 비구름이 몰려온다고 하니, 사실상 내 인생에 이 혜성을 볼 기회는 앞으로 사나흘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 때마침 강원도 산골에 잠시 머물고 있기에, 이곳의 맑은 하늘을 통해 혜성을 아주 잘 볼 수 있겠다고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른 새벽, 대략 혜성이 나타날 법한 방향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하지만 낮에는 주위를 병풍처럼 두른 멋진 산들이, 밤에는 하늘을 가리는 성가신 장애물이 되었고, 여명이 밝아오고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까지도 사진으로 봤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시 그날 밤에는 속성으로 사용 방법을 배운 크고 무거운 천체망원경까지 준비하고 산 중턱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곧 하늘이 구름에 가려 일찍 접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오늘 밤, 세 번째로 물을 먹고 있다. 시간 써가며 기름 써가며 추위를 견뎌가며 산꼭대기까지 와서 앉아 있지만, 여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끈질긴 녀석이다. 이쯤 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고작 우주 멀리서 날아온 얼음 돌덩이 주제에,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수많은 지구인을 이렇게 희망고문시키는 걸까?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효험이라도 있을까? 안되던 일이 다 잘 풀리고 막혔던 창의성의 영감이 샘솟을까? 아니면 어느 애니메이션처럼 잊고 있던 평행 우주의 연인을 찾게 해 줄까? 아니 그런 미신도 믿지 않는 나는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


  물론 내 눈으로 직접 혜성을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보지 못하면 앞으로 영영 못 볼 것 같아서, 놓치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유의 한 절반은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7000년에 한 번이라는 아득한 시간의 길이 때문에 상상 속 후회의 크기는 그만큼 커져버린 듯하다. 실제로도 내가 엄청난 부자가 돼서 냉동인간이 되어 미래에 부활하지 않는 이상, 이번에 놓치면 이번 생애에 다시는 못 본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생각했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것이 어디 혜성뿐일까? 인생에 지금이 아니면 못 보는 것,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 만날 수 있는 사람, 지금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지금만 가질 수 있는 시선, 지금만 만들 수 있는 작품… 뭐 그런 것들이 무수히 있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나의 삶을 매일 지나치는 수많은 혜성에는 무지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혜성이야 7000년 후에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지금 나의 시간, 매 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하늘은 꽤 어두워졌다. 혜성 그까짓 꺼 못 봤지만 좋은 글감이 떠올랐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라고 쓰려는 순간, 차차 검푸르게 변해가는 하늘 위로 뭔가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윤곽이 보이는가 싶어 카메라 장노출로 그곳을 찍어보니 책의 사진 속에서 보던 흰 꼬리가 나타났다. 혜성이다! 처음 보는 혜성은 생각보다 작고 흐릿했지만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음은 언뜻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유성처럼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지도, 비행기처럼 천천히 움직이지도 않고, 마치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지평선 조금 위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옆에서 캠핑을 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 조명을 꺼 달라고 부탁하고, 숲과 밤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셔터를 눌렀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선명한 혜성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처음 본 혜성은 물론 신비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혜성은 못 봤지만 매 순간 삶에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혜성이다’… 라는 글을 쓰려던 나의 계획이 틀어져서 살짝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 늘어져서 허비하는 시간이 많은 내가 무슨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혜성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구는 것 또한 정직하지 못한 것 같다.


  평소라면 그냥 내 찍을 사진만 찍고 내 갈 길을 갔겠지만, 왠지 그냥 가기에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세상모른 채 옆에서 캠핑에만 열중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 밤 사진 찍는 법을 알려주고 혜성 사진을 몇 장 찍어줬다. 사진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내심 뿌듯함이 차오름을 느꼈다. 7000년에 한 번 오는 얼음 돌덩이는 소소하지만 잠시나마 내 주위의 것들에 조금 더 시선을 기울이게 해 줬다. 자신을 지켜보는 모든 지구인들에게 약간이나마 그런 마음이 들게 해 줬다면, 그것은 7000년에 한 번 우주에서 온 돌덩이가 주고 가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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