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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Sep 14. 2022

직장인의 이유 Part2

욕심으로부터 초연함(feat. 직장인 아무개의 욕구)

회색 정장은 안된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아니면 짙은 곤색이여만 한다. 양말과 바지는 깔맞춤이 기본이다. 될 수 있으면 검은색 구두를 신고 신뢰감을 준다는(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블루 계열의 넥타이를 맨다. 목을 죄어오는 느낌의 넥타이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쇼윈도에 비치는 정장 입은 나의 모습이 이렇게나 멋있다니.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니는 주위 직장인들의 모습이 머지않아 나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어깨에 뽕이 들어가는 건 왜일까. 서울 한복판이 나의 주무대 인양 근거 없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회사 로비, 천장이 얼비치는 대리석 바닥과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다. 이런 순진한 근자감은 첫 직장에서의 면접관의 한 질문에 땀이 삐질 나오며 수그러들었다.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 팀 모두가 야근을 하게 되었다. 누구 하나 빠지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아프니 빨리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 당시 미혼이고 직장생활을 전혀 안 해본 나는 전혀 공감을 할 수 없는 그런 질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 있게 면접관의 두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두 상황에서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을 선택하겠습니다. 아내가 아픈 상황에서 제가 꼭 있어야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팀에서 제가 빠지면 안 되는 상횡이니 아픈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야근을 선택할 거 같습니다. 그 대신 아내에게는 계속 연락을 해서 상태를 확인하면서 근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대답은 아닌 거 같다. 하지만 아내가 이 답변을 듣는다면? 오늘의 저녁식사는 고사하고 등짝 스메싱에 등짝이 남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첫 직장을 입사해서 벌써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직장인 14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첫 직장의 면접 질문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얼마 전 우리 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팀원들을 향해 선포를 했다.

"오늘부터 우리 팀은 칼퇴는 없다. 내일부터 웬만하면 초과근무를 하도록 해. 노동청에 신고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으니까 그렇게들 알아. 다들 알지? 우리 팀 사정?"

'우리 팀 사정? 난 모르는데?'

장난기가 묻어나는 농담으로 팀원들에게 얘기를 했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다. 난 오늘도 팀장의 눈치를 보며 칼퇴를 못하는 것을 보면 팀장의 말 한마디는 그저 단순한 농담이 아닐 테다. 그리고 14년 전 면접관의 그 질문이 생각이 났다. 면접관의 질문과 팀장의 선포는 내 머릿속과 사무실 공간에 가득 차있어 퇴근 시간만 되면 귀가 본능을 압박한다. 결국 눈치를 본다.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듯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을 나가야 할 타이밍을 재어보고 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빠져나올 때는 고양이가 되고, 달이 된다. 포효하는 사자가 되지 못하고, 온누리에 빛을 발산하는 해가 되지 못한다.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잘 빠져나왔다. 잘 빠져나왔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직장인 '아무개'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직장인 14년 차임에도 그때의 그 면접관의 질문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면접관의 질문이 실제 직장에서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오늘도 퇴근시간에는 비슷한 고민을 한다. 회사와 가정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수십 미터 상공에서의 줄타기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줄타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직장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회사에서 에이스가 되느냐 가정에서 에이스가 되느냐 그 가운데 두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해답이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게 된다.

당시 면접관의 질문에 답해 보라 한다면 확실히 답변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직장에서는 사심, 즉 사적인 마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직장에서 추구하는 하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마음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직장인은 항상 고민하고 갈등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아르주나'처럼 말이다.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경전으로 주인공으로 아르주나라는 전사가 나온다. 전투에 임하기 직전 아르주나는 고민한다. 유년시절 함께 놀던 사촌들, 자기 자신을 업어 키워주었던 친척들이 전장의 맞은편에 적군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는 그의 칼로 그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아르주나는 '해야 하는 일''하고 싶은 일'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때 '크리슈나'라는 신이 나타난다.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아르주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당연한 일로 여겨라. 대신 모든 감각의 욕망을 버리고 결과나 대가에 얽매이지 마라 그러면 초월적 자유를 누릴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이야기하는 핵심 메시지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직장인에게는 한줄기의 선명한 빛을 선사한다. 욕심을 버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이다. 이것은 결국 몰입과 몰두이다. 해야 하는 일을 내 삶에서 지울 수 없다면 그것에 순수하게 몰입하는 하는 것이 자유에 한 발짝 다가가는 방법이다. 자유로움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과 같다. 바다 언저리에서 파도 거품에 젖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닌, 그 속으로 풍덩 들어가는 것.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초월적 자유이다. 풍덩 들어가는 것, 그것이 몰입과 몰두이다.

일을 주제로 한 <왜 일하는가>와 <내리막 세상에서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도 일하는 자세로 '몰입'을 언급한다. 몰입을 통해 일의 즐거움에 도달한다고 하니, 초연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닷가에서 파도와 같이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일도 직장이라는 바다 언저리에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신발이나 바지 끝자락이 혹여나 짠 바닷물에 젖지나 않을까 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과감히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직장이라는 바닷속으로 첨벙 들어가 바다의 진폭에 내 몸을 맡길 것이다. 목적 없는 순수함으로 마치 어린아이처럼 바닷속을 유영할 것이다. 때론 바다의 짠물이 코로, 입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바다와 하나 됨을 만끽할 것이다. 하나가 되는 즐거움은 직장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기에는 충분하다.

충분...하다.

충분...하다...고.

충분하다니까!

그런데 과연... 충분...할까?

글을 쓰면서 불현듯 생각이 났다. 얼마 전 나보다 먼저 진급한 직장 동기가 말이다. 이 역시 깊고 깊은 바다에 철컹 빠지는 느낌이다. 같은 바다이지만 발이 닫지 않는다. 발이 닫지 않아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유유자적, 초연하게 바다를 즐길 수가 없다. 이번에 나는 진급을 못하면 기약이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동시에 바라지 않고 욕심 없이, 사심 없이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 온갖 이유를 갖다 대어서라도 직장을 버텨야 한다. 버틸 수밖에 없는 나는 그저 직장인 '아무개'일뿐이다. 14년차 직장인은 직장에서 진급을 통해 월급이 올라가고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버릴 수 없다. 이것이 직장인 '아무개'의 솔직한 마음이리라. 이게 나의 진솔한 마음이자 욕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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