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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Oct 14. 2022

직장인의 이유 Part3

직장을 버텨야만 하는 이유

오늘은 14일. 매달 14일이면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업무포털에 접속한다. 그리고 루틴과는 다르게 급여 지급명세서를 확인한다. 우리 회사는 14일부터 급여명세서를 열람할 수가 있다. 매달 받아보는 월급이지만 항상 만감이 교차하는 건 왜일까. 막상 쥐꼬리만월급을 확인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이거 벌자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초과근무 수당을 확인하며

'엥? 이것보다 더 한 거 같은데 잘못된 거 아니야?'

괜한 초과근무 시간을 탓해보기도 한다.

그래도 한달도 고생했다고 애써 자기 위안을 하며

이번 달의 수고로움을 보상받는다.

'언제쯤이면 월급을 보며 풍족하고 뿌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매달 17일, 급여일의 통장에는 월급이라는 숫자가 잠시 스쳐 지나간다. 여행도 그렇고,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설레고 기분이 좋듯 급여일 당일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찍히고 사라지는 숫자가 애석하기 그지없다. 통장에 잠시 왔다간 월급이라는 숫자가 허무한만큼이나 급여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한 달 동안 고생하며 일한 대가로서의 월급은 소중한 가족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필수 재화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월급의 가치는 단순한 돈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 직장인으로서 수고로움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직장인으로서 인정 욕구의 충족은 월급이 나에게 선사하는 소중한 가치이다.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인정 욕구 말고 또 어떤 욕구가 있을까? 욕구를 논하는 데 있어 빠지면 섭섭한 심리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매슬로우이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언급되다 보니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겠다(내게만 식상한 건가?). 식상하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타당하다는 의미이고, 보편타당함은 또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달리 표현하면 진리에 근접한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식상하다는 것은 거대한 메시지를 함포 하고 있다. 식상함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뭐, 어쨌든 매슬로우는 그 유명하고도 식상한 욕구 5단계를  얘기한다. 재밌는 점은 가장 밑바탕의 욕구(저차원적인, 말초적인 욕구라 해야 할까)를 충족해야지, 그다음 단계의 욕구에 도달할 수 있다 하였다.


1단계 생리적 욕구: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욕구
2단계 안전의 욕구: 신체의 위험과 마음을 지키기 위한 욕구
3단계 관계의 욕구: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4단계 인정의 욕구: 자타로부터 인정을 받고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자기완성을 위한 욕구


직장을 매슬로우의 욕구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직장인의 가장 큰 장점인 월급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1단계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또는 윗 단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준다. 또 월급이라는 돈을 통해 2단계 욕구인 안전의 욕구 또한 충족 가능하다. 개인의 하드웨어 측면(신체)이나 소프트웨어 측면(정신)에서의 건강을 보장하여 준다. 참 아이러닉 하게도 직장이라는 '공동체'는  기본적인 '나'를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준다. 나로부터 자연스럽게 불러 나오는 가장 밑바탕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에게로부터 확장된 관계에서 발생되는 3단계 욕구, 소속의 욕구도 충족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직장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인 4단계 욕구, 인정의 욕구까지 직장을 통해 충족시킬 수가 있으니 우리가 그토록 직장 내에서 승진하고 성과를 내려하는 것도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직장인 '아무개'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은? 글쎄다).
직장이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징징거려도 직장인으로서 정기적으로,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 거 만으로도 인간으로서 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대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통해 돈을 버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안정감과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의 인정 욕구의 충족은  한 개인에게 직장의 이유, 더 나아가 인생의 이유가 되기에도 충분하다.




한때는 나도 취업이 내 인생의 이유 인적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아니다. 심지어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을 공개하기도 껄끄럽다. 솔직히 공개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 '팀장이 내 글을 본다면? 회사 고위직이 내 글을 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들이 내 글을 본다면 징계 위원회가 열릴 수도 있겠다.
'이 놈 이것 봐라. 조용하게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호박씨 제대로 까고 있네.'
최소 괘씸죄로 직장이라는 조직에 배신감을 안겨줄게 뻔하다.
직장을 공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규정 상 위반의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직장 규정에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직무와 관련된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엄밀히 따진다면 직장을 키워드로 글을 써서 수익이 창출하는 것은 관련 업무와 무관하니 규정 위반은 아니겠지만, 혹여나 수익이 창출되고(김칫국부터 마셔본다)  글의 노출 정도가 빈번해진다면(이것도 김칫국) 직장인으로서는 좋을게 하나도 없다. 철저히 사적인 욕심은 징계의 대상이다(뭐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직장은 그들이 정한 범주에 사적인 마음 한 방울이라도 섞이는 날에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그럴 바엔 직장과 개인 신상의 노출을 최대한 줄이고 구독자가 얼마 없는 지금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게 어쩌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월급은 쥐꼬리만큼만 받고, 되지도 않은 이런저런 제한만 많은, 나는 그런 직장인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공익을 추구하면서 돈을 버는 직장인. 뭐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그렇게  쁘지만은 않은 거 같다. 나름 사명감이 생기기도 하니까. 이런 나름 대로의 명분은 직장생활을 하는데, 아니 버티는데 꽤나 쏠쏠한 동기 부여가 된다.
사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기업 입장에서는 기업의 이익창출이 목적이겠지만 기업의 이익창출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정도를 생각한다면 이 역시 사회를 위한 대의명분을 찾기에 충분하다. 직장을 다니는 모든 이들은 비록 조직에 속해 있지만 직장을 통해 각자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 귀중한 것'에 대해 얘기한다. 인생을 살면서 꼭 지키고자 하는 신념, 즉 대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이다.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 귀중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직장을 유지하는 데는 물론이고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데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가치에 '이상' 몇 스푼을 더 첨가하면 마틴 루터 킹이 얘기한 '꿈'이라는 멋진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이런 꿈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한낱 이상적인 몽상만으로 생각될 수 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싶다. 내가 사는 인생이 너무나도 현실적이기에 우리는 꿈이 있어야 한다고. 조금은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현실 불가능한 일지라도 이를 통하여 지금의 나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꿈꾸고 있는 가치 대의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목적이 아닌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대의는 직장생활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준 책이 되어준 책이 있으니 그것은 단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은 나의 인생 책이다. 처음으로 생각의 틀을 깨어준 그런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매우 불편했다.
그중 하나가 군중을 향한 차라투스트라의 시선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독 파리떼, 소인배로 지칭하며 경멸하였다. 물론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집단주의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군중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 속에 갇혀 대중의 틀을 깨지 못하는 안일한 개인 역시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싸잡아 경멸하는 것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의 눈빛은 우월주의에 입각한 군중을 향한 일방적인 시선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깨닫지 못해 우매하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독파리나 소인배일지라도 각자 나름대로의 세상과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설사 대중을 이루고 있는 각 개인들이 실제로 우매하고 깨닫지 못한 자들일 지라도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거 자체가 오만함이리라. 모두가 다 똑같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차라투스트라같은 시니컬한 철학자도 있을 수도 있고 조금은 우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 불평 없이 열심히 사는 노동자도 있기에 인류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굴러갈 수 다. 세상 사람 모두가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각자의 환경과 틀을 깨기 위해 투쟁한다면 우스갯소리로 '소는 누가 키우나?'
우매하다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순간 너와 나의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게 된다.


어쩌면 내가 니체가 비판한 우매한 대중 속의 한 개인일 수도 있어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나는 쥐꼬리만 한 한 달 급여로 5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외벌이 가장이 현실인데.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직장인 아무개일 뿐인데. 누군가처럼 쿨하게 가면을 벗어던지기란 쉽지 않다. 그 대신 직장을 버텨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직장인의 이유가 오로지 돈만이 아니라고, 시계추같이 직장-집을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 되뇌인다. 욕망에 초연하기, 주어진 업무에 몰입하기, 본능적인 욕구 충족하기, 직장에 가치 부여하기. 이런 것들이 직장인 아무개들에게는 실질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의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하루도 꾸역꾸역 잘 버티었다. 개인적으로 '꾸역꾸역'이라는 부사와 '버티다'는 동사가 아주 마음에 든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 버티고 티다 보면 뮈라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인생이 별을 향한 항해라 한다면 갑판 밑에서 죽어라 노를 젓는 이유일 것이고, 인생이 정상을 향한 등산이라 한다면 죽어라 땅만 보고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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