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하철에서 나와 회사로 향한다. 회사 가는 길, 조그마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사무실 책상에 앉는다. 책상 열쇠를 꺼내어 서랍을 열고 업무수첩에 적어 놓은, 해야 할 일들을 훑어본다. 커피 한 모금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나의 분신인 컴퓨터를 켠다. 메신저에 접속해 쪽지와 메일을 확인하고 전자 업무 포탈로 공람문서를 확인한다. 문서함의 문서들을 열람하면서 업무 흐름을 파악하고 업무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오늘도 폭풍 속을 항해하는구나.' 직장인 모드로 '온'을 하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파이팅을 외쳐본다.
소소하게나마 일련의 루틴들은 아침 의식과도 같다. 군대에서 말하는 민간인 물 빼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회사 밖의 물을 빼고 직장인으로 준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 슈퍼맨은 클라크로 변할 때, 또는 클라크가 슈퍼맨으로 변할 때 휘리릭 몇 바퀴만 돌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대략 15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쓰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신규 시절, 적어도 출근시간 20분 전에는 도착하라는 선배의 조언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가면을 쓰는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있지 않으면 여러모로 쫓기게 마련이다. 결국 가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가면에 종속되면 하루 종일 불안하고 더욱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회사에 일찍 도착해서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지배해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쉽지만은 않다.
"팀장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음. 그래 수고했어." 대답은 쿨하지만 뒤통수가 뜨겁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나의 퇴근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편한 나의 뒷모습이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사를 한이상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기 전 호기롭게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야만 한다. 퇴근시간에는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이다. 회사 건물을 나오고 지하철로 가는 길, 계속 책상에 앉아있는 팀장의 모습과 사무실 풍경이 머릿속에 맴돈다. 딱히 특별한 일도 있는 것도 아닌데 책상 서랍을 잘 잠그고 나왔는지, 중요한 문서가 책상 위에 올러져 있지 않은지, 제출한 보고서에 오탈자가 없는지, 팀장이 지시한 업무 중 혹시나 잊은 업무가 없는지, 온갖 것들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직장인이라는 가면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9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이런 잔상들이 당연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직장인 가면이 쉽사리 벗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지하철 퇴근 시간은 '직장인 나'와 '진짜 나'가 화해하는 시간이다.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도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직장인이라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는다. 직장인이라는 망령이 현세를 떠나지 못하는 거 마냥 주위를 계속 맴돈다. 나의 마음과 머리는 아직 회사에 머물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치 내가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망령 같다. 망령을 쫓기 위해 책을 펼치고 글쓰기 앱을 연다.읽기와 쓰기의 도움으로 퇴근 시간은 완충의 시간으로 점점 변모한다. 만차가 된 지하철 안에서 사람에 치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지만, 이 마저도 소중하다. 몸을 가누기 힘든 대신 마음을 가누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이렇게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벗기 위한 노력은 약 30분가량의 시간이소요된다. 퇴근시간 동안 직장인 가면을 벗기 위한 마음 부림은 처절하고도 필사적이다. 더 이상 직장인 가면이 맨 얼굴에 고착되지 않게 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자 반항이다. 발악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미쳐 날뛰지는 않고, 반항이라고는 하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파동을 일으켜 조용한 아우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가면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 부림이다. 부서지는 몸과 마음을 챙기고자 하는 맨 얼굴의 존재의 표현이다.
가면에 발악하고 반항한다고 해서 가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면 또한 나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이니까. 가면이 있어야지 내 삶이 움직이고 유지된다. 좋은 남편이 되기도 하고 좋은 아빠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리듬을 타는 드러머가 되기도 한다(요즘 드럼을 배우고 있다).가면은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사회적 역할이다.그렇게가면을 쓴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잘 살고 끝나면 아무 문제가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면이 멋지고 좋아 보일수록 가면과 맨얼굴 사이의 틈은 나를 괴롭힌다. 가면과 일치하지 못하다는 괴리감은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가면이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가면인지 진짜 나인지 조차도 헷갈린다. 아빠로서의 나의 모습? 남편? 학부모?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 나로 살지만 나로 살기가 이렇게나 힘든 이유이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그럴 수밖에. 그렇기 때문에 나의 맨얼굴에 대한 갈망을 놓아 버릴 수가 없다.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걸맞은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정답이 있기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점을 찾을 수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직장인은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나 강력하고도 벗기 힘든 가면이라는 점이다.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가면을 벗어야만 한다. 이것이 '퇴사를 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직장을 열심히 다니는 직장인의 퇴사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