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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Nov 08. 2022

퇴사의 이유 Part2

퇴사는 불혹도 흔들리게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협력'을 얘기했다. 동물도 협력을 하긴 하지만 사피엔스의 협력의 규모와는 비교 불가이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존한 사피엔스는 이러한 협력을 통해 지금의 거대한 사회적 공동체와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일구었다.

사피엔스에게 협력이란 지구상에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책에서 얘기하는 협력에 대해서 마냥 예찬만은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협력 다 좋은데, 너무 통치자 입장에서만 협력을 예찬하는 건 아닐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협력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불편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왕정시대가 아니어서 누군가의 통치를 받거나 지배를 받는 건 아니지만 협력이란 단어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불과 몇십 년까지만 해도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당연시 여겨졌다. 뭐, 솔직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왕의 다스림, 일본의 침략 시대, 근대의 군정부 시대에서 우리는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심지어 요구까지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 일까? 충분히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고 있는 시대일까? 근대를 포함한 그 이전 시대보다는 확실히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실제로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은 떨쳐버릴 수 없었.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개인의 자유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그런 시대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개인의 자유는 자본이라는 경제적 가치와 접목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자본의 가치는 시대가 거듭될수록 더욱 가중되어 그 정도가 이제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은 또 다른 왕의 귀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백성을 다스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회 구성원을 다스린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돈은 각자의 개인을 종속시킨다. 인간 위에 군림한다. 대표적으로 단적인 예가 현대판 '관노비''사노비'이다. 보통 어떠한 조직체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관노비, 사노비로 일컫는다. 공적인 조직에서의 직장인을 관노비, 사적인 조직에서의 직장인을 사노비. 그냥 우스갯소리로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 노비라는 것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이라는 공동체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 일단 자본, 즉 돈에 자유롭지 못하며 동시에 직장에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사내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해도 회사에서 지향하는 가치에 반해서는 안될 것이다.


직장에서는 각자의 개인보다 하나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공동체의 일원일 뿐이다. 개인 고유의 색깔은 조직의 순백색에 방해만 될 뿐이다. 이때부터는 개인은 없어지고 사노비와 관노비는 시작된다. 심지어 공동체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상황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방해만 될 뿐이다. 각자의 상황을 존중하기는커녕 인정해 주지않는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조직이 개인의 성향을 무시한 채 협력에 동조하고 심지어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인의 희생이 수반된다.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고 심지어 직장을 위한 희생자는 훌륭한 직장인으로 칭찬받는다.

점점 개인의 마음은 잠식되어 간다. 직장에서의 욕구 충족이 내 인생의 모든 욕구 충족인 거 마냥 직장과 개인은 하나가 된다. 모든 기쁨을 조직에서 갈구하고 그것을 충족하면서 나의 인생을 조직에게 헌납한다. 결국 나란 존재는 0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인생을 헌납하든, 0으로 수렴하든, 무엇으로부터 욕구를 충족하고 기쁨을 찾아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동화 속 해피엔딩이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주절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산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특히나 직장은 더욱 그렇다.




일 잘하고 빠릿한 사람은 진급도 빠르고 실적도 좋다. 회사가 바라는 인재상이다. 그런 만큼 인정도 받고 부족하지 않은 돈도 벌면서 나름 만족한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좀 더 일을 잘하고 좀 더 빠릿한 사람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고 그로부터 느끼는 박탈감이나 욕구 결핍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결과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가장 불행한 것은 조직의 기준에 충족되지 못하면 조직으로부터 가차 없이 내쳐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해관계로 계약 맺어진 조직과 개인은 조직의 가치 추구와 수익 창출이라는 목적에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통보받는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마땅한 개인은 엄청난 상실감으로 사로 잡힐 것이다. 평생 나의 모습이라고 여겨왔던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시때때로 발생한다. 이것은 일종의 배신감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힌다. 이건 뭐 젊은 시절 짝사랑도 아니고 불혹을 넘겨서도 실체가 없는 회사라는 조직에 이런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직장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진짜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직장의 메리트는 없는 듯하다.

'그러면 진짜 나를 찾기 위해 퇴사만이 정답인 것일까?'

불혹을 넘긴 지금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뼛속까 직장인의 불혹이라는 심지의 촛불은 퇴사의 유혹이라는 거센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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