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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Nov 14. 2022

퇴사의 이유 Part3

퇴사를 못하는 이유

요즘 우리 집에서는 MBTI가 한창 유행이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얼마 전 MBTI책을 사서 읽고 있는데 시도 때도 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아빠는 I야, E?"

"... 아빠는 확실히 I라고 생각해."

"맞아 당신은 확실히 I."

그렇다.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내향적 인간이다. MBTI상에서 I의 성향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솔직히 MBTI에 관심이 별로 없다) 나는 말이 별로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사람과 어울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힘들어진다. 이것만 봐도 확실한 내향형 인간이다. 이런 성향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편향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성향은 직장생활에서도 반영된다.


사무실에서 나는 말이 없다. 웬만하면 표정도 없다. 말은 해야 할 때만 간략하고 정확하게 얘기한다. 누군가는 이런 무정한 사람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직장생활도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직장의 규칙을 정했다. 말은 많을수록 좋지 않다는 이다. 14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다. 내 성향상 더욱 그렇다. 말이 많아질수록 쓸데없는 말이 늘어난다. 말을 최소화하니 감정표출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직장생활에서 나를 표현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모든 직장인이 나와 같지는 않겠지만 이런 상황을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직장에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슬픈 일은 '표현할 '가 없다는 점이다. 한평생 이렇게 살아왔으니 당연하다.'나'를 표현할 당위성조차 다.




'나를 표현함'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함을 말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입으로 표현하기, 즉 말하기가 될 것이다. 그 외 손으로 표현하기(글쓰기, 그림, 연주, 창작활동 등), 얼굴로 표현하기(감정 표정 등)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건 간에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특히 직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고위직들 중 농담도 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사람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개인의 고유한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기나 할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직장에고위직들조차 표현에 있어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직장에서의 다수의 직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표현에 있어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이런 자유로움은 있는 자들의 여유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 고위직에 있다는 것은 우수한 실적을 인정받고 승진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실적과 승진'이라는 직장의 시스템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 실적승진은 단순히 인정의 욕구 충족이나 풍족한 급여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직장에서는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실적과 승진은 직장에서의 '나를 표현함'이다. 직장이 추구하는 가치에 걸맞은 실적을 쌓아야 하고 실적을 인정받아 승진함으로써 직장인으로서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인으로서 실적과 승진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실적과 승진의 정점에 있는 고위직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의 소수는 무한 경쟁 속에서 다수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김으로써 우수한 실적과 승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소수의 노력에 대한 예찬과 다른 하나는 그 외의 노력에 대한 격려이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떨어지는 경쟁이라는 시스템 하에서 각자 개인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위너의 노력만을 예찬하는 그런 시대적 분위기는 무한 경쟁시대, 즉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너의 노력에 대한 예찬뿐 아니라 루저의 노력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저를 포함한 각자의 개인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능력이 기반이 되는 경쟁사회에서는 언제까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만 있을 수 없다(피라미드 꼭대기 정점이란 게 있기나 한 것일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기에 영원한 위너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어제의 위너는 오늘의 루저가  수 있다. 위너에서 루저로의 전락으로 인한 허탈감은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최상위 자일 수록 그 정도는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나 직장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피도 눈물도 없다. 공동의 가치에 충족되지 못하는 자는 가차 없다. 나보다 우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직장을 향한 충성심이 크면 클수록 만큼의 허탈감은 커질 것이다. 개인이 느끼는 허탈함은 직장이 책임져 주지 .


인간이라는 존재가 혼자 살 수 없음에 사회 속에서 일하고 사회를 위해 이바지 함은 아주 보편타당한 가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사회, 즉 공동체를 위한 맹목적인 노력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항상 조심하고 되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각자의 개인이 어떤 공동체의 부속품으로의 전락을 당연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개인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의 맨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면을 벗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가면은 가면일 뿐이다. 이 모습이 나를 책임져 주지 못한다. 나를 책임져 주는 모습은 가면을 벗은 나의 맨얼굴일 것이다. 맨얼굴의 맨 입으로 맨 손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덜컹덜컹~

야근을 마치고 지하철 안에 몸을 가눈다. 어둑어둑한 시간, 지금이 출근시간인가, 퇴근시간인가. 머리가 멍하다. 잠시 후 새벽에도 멍한 머리로 출근 지하철 안에 몸을 나누겠지. 가면을 쓰고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 솔직히 이게 가면인지,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사람들 틈바귀에 끼여 녹초가 된 몸 하나 가누기도 버겁다. 지하철에서 흔들리는 몸이 내 몸인지, 니 몸인지 모르겠다. 직장에서의 격무와 기나긴 출퇴근 시간으로 나는 없어지는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퇴근시간만이라도 단순히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로 향하는 시간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니 이건 가히 발악이다. 가면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진짜 나를 지키기 위한 발악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발악이든 반항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진짜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거듭되는 질문의 끝에 드디어 마지막 질문에 종착한다.


직장에서는 진짜 나를 찾을 수 없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직장을 다니면서도 다른 곳에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는 퇴사만이 정답일까?


마지막 질문의 나만의 답은 아니요 이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 퇴사도 할 수 있고 이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퇴사를 한다고 해서 이직을 한다고 해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나를 표현함이다. 나를 표현하면서 진짜 나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직장인의 가면을 쓰고 오로지 실적이나 승진만이 나를 표현할 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직장인의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맨손으로, 맨입으로 진짜 나를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그곳이 직장이든 아니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표현의 주체로서의 '나'
표현의 대상으로서의 '나'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플랫폼

 세 가지가 확보가 된다면 굳이 퇴사를 할 필요도 없고 이직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반대로 이런 고민 없이 그저 힘들어서 사직서를 제출한다면 직장인이라는 보편타당한 가치무색해질 것이다. 직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보편적 가치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글을 쓰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뒷받침되어야지 보란 듯이 사직서를 던져버리고 당당하게 회사문을 박찰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자문한다

'그래도 퇴사가 하고 싶으냐?

. 그래도 하고 싶어. 철학이고 자시고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이렇게 매일 투덜거린다. 그래서 나는 아직 퇴사를 못하는 '직장인 아무개'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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