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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뇽씨 Apr 27. 2021

미운오리새끼가 살아가는 법

학교를 뛰쳐나온 전국단위자사고의 기초생활수급자

"이 표에 여러분의 장래희망 직업이 있나요?"

 고등학교 2학년 사회문화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소득 상위 10% 직업과 하위 10% 직업이 기록된 표를 보여주며 하신 질문이다. 나를 비롯한 26명의 친구들이 앉아있던  교실에서는 망설임없이  많은 손들이 올라갔다.

표를 훑어보던 나는 장래희망 계획에는 없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그 중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 직업은 하위 10% 군에 있었다. 하위 10% 직업군을 조금 더 찬찬히 보던 나는 그 표에서 우리 아버지의 전 직업도 발견했다.


"이쪽부터 차례로 어떤 직업인지 말해볼까?"

선생님은 왼쪽 분단 맨 앞에 앉아 있던 친구부터 한 명씩 지목하며 물어보셨다.

대부분 소득 상위 10%의 금융, 경영 분야 직업을 대답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저기에 있구나.'하는 순진한, 아니 순수한 마음으로 손을 들었던 나는 두 번째 친구의 대답까지 듣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 좋은 대학을 가고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해도, 내가 자란 환경에서 습득한 가치관과 배운 삶의 방식 때문에라도 지금 같이 교실에 앉아있는 이 친구들보다 더 잘 사는 인생을 살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며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지금 이 교실에 앉아있는 친구들보다 성적, 경제적 부 등 눈에 보이는 세속적 가치로는 조금 뒤떨어질지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 정서적 능력, 예능으로는 앞지를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못난 사람이 아닌데, 왜 끝까지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으로 대우 받아야 하지?' 하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에 시야가 흐려졌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짠맛을 혼자 느꼈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고등학교에서 거의 이분법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구도의 빈부격차를 느낀 것은

1년 전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나와 친구 셋, 그리고 가이드 분, 이렇게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쾌활한 성격의 가이드분은 크고 낭랑한 목소리로 식당의 분위기를 띄우셨다.

식사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어가던 중 가이드분께서는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네 아버지 뭐하시니?"


가이드분 옆에 앉아 식사를 하던 친구들이 대답했다.

"의사예요."

"펀드 매니저이세요."


나는 맞은편에 앉은 나한테까지 질문이 올까봐 정말 겁이 났다.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안 물어보지 않을까?' 다행히도 가이드분께서는 처음부터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던 나에게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밥맛이 뚝 떨어진 나는 접시에 받아온 스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식사 시간이 끝나버렸다.


또 한 번은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하는 방과후 시간이었다. 로봇 기술 발전에 관한 영어 지문을 읽고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6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인원이 자유롭게 토의하다보니 대화 주제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자동차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을 때쯤이었다. 우리의 토의를 진행하던 원어민 선생님께서는 대화소재가 떨어지셨는지 잠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듯 하시더니, 옆 친구한테 부모님이 보유한 차종을 물어보셨다. 그리고 그 질문을 모두에서 돌아가면서 하셨다. 외제차의 이름을 말하는 친구도 여러 명 있었고, 집에 차가 두 개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친구도 있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소나타요.' 하고 대충 생각나는 차종 이름을 댔다. 우리 집에는 차가 없는데 말이다.


전국단위자사고, 대한민국 성적 상위 5% 내에 드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 부모님 소득이 월 500만원 이상이 기본인 학교. 그 집단에서 나의 존재는 하찮다 못해 비참하게 느껴졌다.




노란 오리들 사이 섞인 회색 오리새끼 한 마리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참 순수한 백구같은 아이였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한 데 어우러져 생활하던 중학교 때까지는 빈부격차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사고라는 환경에 몸 담은 나는 마치 검은 바탕에 흰 점이 된 것 같았다. 교단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들께서는 "너의 잘못이 아니다.", "살아봐라. 힘든 일 더 많다. 해결될 일도 아니고..." 라고 말씀하신다. 다 옳은 이야기라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았지만, 어린 내 마음이 느끼기에는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냉정한 야단으로만 들렸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아끼던 필통이 망가져 울고 있는 아이보고 뚝 그치라고 하듯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사소한 것에도 부러움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주말에 학원에서 기숙사 인근 거리로 돌아와 싼 저녁거리를 찾아 거리를 활보하다보면 종종 보이는 차를 몰고 온 부모님과 아이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친구들, 끼리끼리 모여 나와 함께 고기를 구워먹는 친구들이 보였다. 혼자 다니는 사람도 나 뿐이었고, 무엇을 먹는 것이 가장 돈이 적게 들지 고민하는 사람도 나 뿐이었다.

학원을 마치고 버스를 놓쳐 통금 시간에 늦게 도착해 20분동안 춥고 비오는 바깥에 서서 사감 선생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길 기다렸던 시간들, 밖에서 혼자 기다리다 들어갔던 나와, 부모님 차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와 기숙사로 들어가는 다른 사람들.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마치 큰 바위가 파도에 깎이듯, 거의 느끼지 못할 미미한 속도로 하루하루 내 자존감을 깎아 지금의 겁많고 소시민적인 나를 만들었다. 친구들 여러 명이서 식사를 하러 가면 항상 맨 뒤에 섰고, 식탁에 앉을 때는 한 번도 중간에 앉은 적이 없었다. 늘 무리의 맨 끝에 앉았다. 무의식적인 행동들에서조차 이미 낮은 자존감이 보였다. 그리고 이런 내 자존감을 인지하면 할수록 나의 정신 건강은 점점 더 깊은 바닥으로 파고 들어갔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미술대학, 예술대학 진학의 , 어려운 가정 형편 모두  혼자만 가진 특성들이었고,  특성들로 인해 나와 친구들은 근본적으로 사고방식, 생활 자체가 달랐다. 나와 너무나도 많은 차이를 가진 친구들과 깊이 있게 친해지지 못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야기하기 편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친구들과의 차이에  자신을 끼워맞추며 이야기하고 함께 노는 일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내가 느끼는 나와  친구들과의 차이,  크기는 커도 커도 너무 컸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겨내고 좋은 관계를 지켜나갈 시간과 에너지도 내게는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지만, 딱히 말썽도 피우지 않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칭찬을 듣는 일도 딱히 없었고 꾸중을 듣는 일도 그다지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 그렇게 학교에서 나는 있는  없는 듯한 존재이다.

외로움과 낮은 자존감은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내 삶의 영역들을 차례차례 망가뜨렸다. 매 순간 느껴지는 외로움에 더해진 교내 하위 10% 안에 드는 성적과 엉망이 되어버린 위장 건강은 나의 삶을 더욱 천근만근 짐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그런 내 아픔을 가슴에 품고도 사람들 앞에 당당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도, 용감하지도 않다는 것을.

열심히 달리다가도 가끔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직은 좀 어린 열여덟이어서.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될 수 있을까?

 

  몇 년 후 내가 사회로 나아갔을 때는 이런 현실과 수도 없이 맞딱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에 굳은살을 만들자고 생각하며 버텼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 문화가 부끄러운 거라고. 어딜가나 맨 뒤에 서서 쩔쩔매는 것, 늘 내가 져주는 것, 분하다고 생각하면 분한 일이다. 돈 없고, 시간 없고, 사람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미술학원 다니는 주말마다 2000원도 안 되는 김밥을 사서 길거리나 버스에서 먹거나 굶는 것, 힘들고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가난해서 오히려 다행이다.

 

  나에게 '부족함' '아쉬움' 있었기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많은 것을 이해할  있었.  스스로 수차례의 심적 방황과 좌절을 마주했기에, 이런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았을  가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버팀목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아픔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함께 느껴주며  사람이 험난한 여정을  버텨낼  있게 함께 느낄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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