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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21. 2023

#22. 달큰한 대장균 냄새

내년 3월이 되면 이 회사에서 일한 지 18년이다. 그전 회사 경력까지 합하면 이 분야에 몸 담은 지 20년이 된다. 이렇게 오래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또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동안 20대였던 나는 40대가 되었다.


연말이라 프로젝트도 거의 끝나 요즘은 한가한 날들이다. 어제 오후에 책상에 앉아 빈둥대다가 문득 나 그동안 뭘 좀 이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나는 어떤 성취의 순간들을 맛본 적이 있나? 아니면 이 분야에서 이렇다 할 전문성을 갖게 되었나? 보람찬 날들을 많이 쌓았을까?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답을 하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가장 큰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직업이라는 것이 있어야 생활이 유지되므로 직장에 오래 다녔고, 그렇게 해서 비교적 안락한 삶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목적은 달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개운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인생의 반이라는 시간을 써 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내 시간의 대부분을 써야 하는 곳인데 어떤 의미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까.


누가 보면 꽤나 의식 있는 직장인인 줄 알겠다.

사실 나의 직장생활은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적절히 밥값을 하는 정도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 나의 모토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더 분명한 뭔가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공부 못하는 학생은 되고 싶지 않다는 내 아들에게 그건 도둑놈 심보 라고 했던 그 말을 내가 그대로 돌려받을만한 짓이다.



그렇게 맹렬히 는 아니고 잡생각과 비슷하게 일과 직장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하며 실험을 하고 있는데, 문득 달달한 대장균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미생물 분석을 하는 사람이다.

이제 연차가 쌓여서 실험은 많이 하지 않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 서류 작업보다는 실험을 한다. 실험하는 일은 몸을 쓰는 일이다. 많이 움직여야 해서 번거롭지만 머리를 짜내야 하는 다른 일에 비해 담백해서 좋아다.



실험대 앞에 앉아서 플레이트에 키워놓은 세균들을 정리하는데 대장균 냄새가 났다.

대장균은 배지에 키우면 달달한 냄새가 난다. 배지의 종류에 따라서 냄새의 종류가 바뀌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달달한 냄새를 뿜어낸다.


한편 황색포도상구균은 조금 더 꼬릿한 냄새가 난다. 오래 두면 그 냄새가 더 진해져서 굉장히 지독하다. 감염되면 농을 일으키는 화농균의 한 종류이다. 그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에 염증이 생겨 고름이 나오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다.


녹농균은 조금 더 비릿하다. 아주 비린내는 아니고 어항에서 날 만한 냄새 약간에 화한 약품 같은 냄새가 섞여있다. 특히 이 균은 여러 가지 색소를 지니고 있어 생장 환경에 따라 시기별로 다른 색소를 내뿜는다. 그래서인지 시기별로 냄새가 약간씩 다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주 쓰는 균의 냄새를 알고 있다.

어디에서도 균을 냄새로 분류하라는 말은 없다. 실험에 사용되는 균은 아주 위험한 것들은 아니지만 몸에 접촉해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에 플레이트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는 행위가 좋은 짓은 아니다. 하지만 실험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냄새를 맡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세균들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오랜 직장생활이 준 능력 중 하나인가? 어디다 자랑하기는 하찮고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쓸데없는 능력이지만 이런 능력이 생겼다.


일하다 보면 이런 잡스러운 능력들이 심심치 않게 발휘된다.

스크루 튜브 몸통을 주먹으로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뚜껑을 가볍게 돌려 여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할 자신이 있다.


뜨거운 배지를 시료가 들어있는 플레이트에 부을 때 적당한 온도는 45도이다. 이것보다 뜨거우면 시료 속의 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온도가 중요하다. 오븐에서 나온 배지가 너무 뜨겁지 않은지 팔뚝 안쪽에 대 보면 알 수 있다. 아기 분유를 탈 때처럼 만져보면 재 보지 않아도 안다.


이런 것들을 누가 인정해 주나.  

진급을 하기 위해 자기 자랑을 해야 하는 공적서에 "세균을 냄새로 구분할 수 있음"이렇게 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을 떠올리다 보니 은근한 자부심이 든다. 이십 년을 같은 일을 해 왔고 그로 인해 본능처럼 몸에 배 버린 습관들은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된다.



튀김 장사를 40년 했던 사장님이 TV에 나온 적이 있다. 사장님의 손은 붉고 퉁퉁 불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펄펄 끓는 기름솥에서 튀김의 끝부분을 손으로 슬쩍 잡아서 건져냈다. 분명히 기름이 손에 닿는 것 같은데 뜨거운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을 데면서 익숙해진 걸까. 그가 만든 맛있는 튀김에 대한 찬사보다 그 온도에 익숙해져 버린 손이 더 인상 깊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직 20년을 채우지 못한 중간쯤의 일꾼이다.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지만 시간이 쌓여 본능에 가까운 어떤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디다 자랑할 일이 못돼도 내가 이런 능력을 갖게 될 만큼 이 일을 오래 했고, 집중하며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토닥일 만하다.

그러니 이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 일을 조금 더 해 볼 수 있겠다.  오늘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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