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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19. 2023

#20. 고무나무 실은 트럭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때 그 기억은 마음의 풍요가 되어

고무나무를 보면 꼭 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지난 월요일에 갔던 카페는 커다란 고무나무와 맑은 창이 잘 어울렸다. 그때 그 고무나무도 딱 저만한 크기로 기억된다. 그래서 더 생각이 났나 보다.




중학교 1학년때 반장이었다.

엄마가 공장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라 평일 낮에 전혀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이 반장이 되었어도 엄마는 선생님을 만나러 올 수가 없었다.


남녀 합반이었던 우리 학교는 반에서 여자반장 한 명, 남자 반장 한 명을 뽑았다. 남자 반장 엄마는 선생님과 매우 친하고 우리 모두가 얼굴을 알 만큼 학교에 자주 오셨기에 나는 더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는 내내 부업을 하거나 일을 하러 다녔기 때문에 그때도 학교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엄마가 말했다.

"니네 선생님 사람이 좋더라. 어머니 안 오셔도 괜찮아요. 그러더라."

"엄마 학교 왔었어? 근데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뭘 말해. 그냥 얼른 갔다 왔지."

이 엄마가 왜 이래? 반장 돼서 신경 쓸 일 많다고 투덜댈 때는 언제고? 혹시 좋았나?


아무튼 한 번은 와 준 엄마가 고맙기도 하고 선생님이 안 오셔도 된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마음이 놓였다.


며칠 후, 수업시간에 우연히 운동장을 바라봤다. 이런 것이 운명의 끌림인가.

딱 그 주에 나는 창가에 앉는 순서였고, 딱 그 시간에 아무 이유 없이 운동장을 봤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파란색 1톤 트럭에게 내 눈길이 머물렀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기아 봉고트럭이다. 우리 삼촌차랑 똑같이 생겼네. 생각하며 멍하니 바라보는데, 본관 앞에 정차한 트럭에서 우리 삼촌이 내렸다.


삼촌? 삼촌이 왜 ?


우리 삼촌은 모노륨 장판가게를 하고 있었다.

아, 혹시 학교에 장판 깔 일이 있나? 오만가지 상상이 몇 초 안에 물밀듯이 밀려오던 중 삼촌은 짐칸에서 커다란 화분 두 개를 내렸다. 역시 낯익은 그 화분은 바로 우리 집 베란다에 있던 화분이었다.

고무나무 하나, 또 하나의 이름 모를 빨간 열매가 맺히는 나무 하나.


아, 이런.

그림이 맞춰졌다.

"엄마가 바빠서 못 온다고 뭐 필요하신 거 있냐고 하니까 그럼 화분이나 하나 사주세요. 그러시더라. 엄마가 화분하나 보내줄게."


그랬다. 엄마가 화분하나 보내준다고 했었다.

나는 무릎높이까지 오는 자그마한 국화 화분을 상상했었다.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보내준 화분들은 대부분 그런 모습이었다. 꽃가게에서 파는 낮은 화분에 국화 종류가 다복하게 피어있는 것으로 아이들이 들고 옮기면서 물을 줄 수 있는 그런 화분이었다.

다른 엄마들이 학교에 보내주는 화분은 저렇게 둘이서 들 수 있을까 고민이 될 만큼 무겁고 내 키만큼 큰 열대 고무나무가 아니었다.


다행히 삼촌은 나를 부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선생님을 찾아서 나무를 전달해 준 것 같았다. 나는 삼촌이 온 것은 창피하지 않았다. 그 열대 우림에서 캐 내온 것 같은 나무가 창피했다.


오후 종례 때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칭찬해 주셨다.

"엄마가 아주 좋은 나무를 보내주셨더라. 너무 근사해. 고맙다고 말씀드려라."

어떤 대답을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고맙다는 인사도 어처구니없어서 하시는 빈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화를 낼 성격은 못돼서 은근히 물어봤다.

"엄마, 화분을 너무 큰 거 보낸 거 아니야? 보통은 작은 국화 화분 같은 걸 가져오는데......"

"그게 어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국화는 싸구려야. 아주 큰 맘먹고 보냈다."

"어, 선생님이 고맙대."


그냥 싸구려를 사줄 것이지.


그날 이후 그 화분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를 장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선생님이 학교 어딘가에 두고 돌보셨던 것 같은데 난 관심도 없었다.


학년이 끝나고 겨울 방학이 다되어 갈 때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화분이 너무 좋아서 엄마 다시 갖다 드리라고 하려고 했는데, 한 개가 없어졌더라. 고무나무를 누가 가져간 건지 없어져서 어쩌니. 나머지 한 개는 가져가라."


일 년 내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시절 내내 우리 집에 있던 나무였는데 사라졌다는 말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엄마, 고무나무 없어졌대. 그 열매 여는 나무 그거 하나만 운동장에 있어."

"아이고, 그게 좋으니까 누가 가져갔나 보다. 아까워라."


빨간 열매가 여는 나머지 한 개의 나무는 언제 아빠든 삼촌이든 가지러 왔었는지, 그 후 우리 베란다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고무나무는 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그렇게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로 나를 창피하게 할 때가 있었다.

손톱 밑이 곪아서 짜내고 붕대를 감아준다면서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이불 홑청을 뜯어서 묶어 줬다.


"붕대 없어? 이게 뭐야."

"붕대는 꽉 안 묶여. 이게 좋은 거야."


나는 그 빨간 꽃이 보일까 봐 안 그래도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최대한 안 보이게 주먹 안으로 집어넣느라 고생스러웠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저고리 만들기를 할 때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 앞 문방구에서 얇은 갑사 천으로 만들어진 저고리 만들기 키트를 사가지고 갔다. 나만 엄마가 약혼할 때 입었다는 분홍색 공단 천을 잘라 갔다.

안팎으로 두 겹을 붙여야 했기 때문에 시접 부위는 네 겹을 겹쳐 꿰매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갑사천은 네 겹을 꿰매도 얇고 비쳐서 다른 애들은 금방 쉽게 꿰매는 걸 나는 두툼한 공단 천 네 겹을 꿰매느라 바늘이 안 들어가 손가락이 부르트는 줄 알았다.


없는 살림에 뭐든 해주려는 엄마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불만을 참은 일도 많았고, 우리 집은 돈이 없으니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엄마는 해 줄 수 있으면서도 돈이 아까워서 안 해준 일들도 많았던 것 같다. 그냥 자기 편한 대로 이만하면 되지 뭘! 했을 엄마를 상상하니 은근히 약이 오른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 이런 일들을 떠올려 보면 웃기고 엄마가 좋아진다. 아마도 엄마가 선생님과 약속한 화분을 조그맣고 앙증맞은 국화 화분으로 사 왔다면, 늘 내가 망신스럽지 않게 내 입장을 생각해 줬다면 나의 사춘기는 조금 더 평탄했을 거고, 지금 나는 훨씬 재미없는 사람이 돼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고집 센 엄마 덕에 잔머리도 많이 굴렸고,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은 성인이 된 후에 웃기는 일들로 바뀌었다.



나는 이제 중학생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보다 많이 배우고 조금 더 체면을 차리는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창피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처럼 마음고생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고, 아이에게 점수를 잃고 싶지 않은 치사한 마음도 있다.



그러고 보니 그럼 내 아들은 너무 심심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건 아닐까?

아니다. 다행히 이번에도 우리 엄마가 있다.

직장에 다니는 나 때문에 손자의 양육을 반 이상 책임지고 있는 엄마는 이제 할머니로서 활약을 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딸한테 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배려 깊어져서 가끔 나를 황당하게 하기도 하지만 내 아들에게 할머니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충분히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사랑이 가득 담긴 과잉보호로부터 은근슬쩍 벗어나기 위해 뺀질거리는 아들을 볼 때 나는 몰래 웃는다.


조금 더 세련된 엄마보다는 매일 맛있는 반찬을 해 주시고 푸근하게 이것저것 참견하는 할머니에 대해 더 많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갖게 되리라.  이제는 웃음이 삐져 나오는 고무나무와 같은 추억들이 아들의 어린 시절 어디쯤에도 남아있어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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