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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18. 2023

#19.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물건은 없는 것과 같다.

비우는 쾌감

지난주 병원에 다녀와서 신청한 실비 보험 환급금이 나왔다. 확인하자마자 서랍에 넣어두었던 증빙서류를 냉큼 갈아버렸다.

아, 새삼스럽게 통쾌했다.


보험 환급 후 증빙서류를 버리기 시작한 것은 일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전에는 파일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안에 증빙 종이를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혹시 나중에 헷갈리지 않게 신청일과 환급일, 날짜 두 개를 서류머리에 적어두고, 순서도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면 착착 꽂아두었다. 나와 아들 서류를 같이 모아 놓은 파일집이 거의 꽉 차서 새로운 파일이 필요할 상황이 되었다.


어느 날 남편과 보험 환급금 얘기를 나누다가 남편은 서류들을 전혀 보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몇 년간 보관한 서류를 다시 꺼내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히려 나중에 신청할 생각에 따로 모아놓고 잊어버려서 늦게서야 환급받거나 유효기간이 지나서 받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다.

반면 남편은 병원에 다녀오자마자 사진을 찍어서 환급을 받고 바로 버려버린다.

뭐가 현명한 건지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모아놓았는데 혹시 모를 일은 절대로 없었다. 어차피 한번 환급받고 나면 재 신청할 일도, 따질 일도 없다.


 파일에 있는 종이들을 다 갈아서 버렸다.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두툼한 파일 하나가 비어서 서류서랍도 공간이 생겼다. 날짜대로 정리할 일이 없어졌으니 시간도 줄었다.


그 후, 당장 귀찮아서 미뤘다 했던 환급 신청도 그날 그날 해버리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다. 놓칠 일도 없고 머리도 상쾌했다. 뭔가를 나중에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미뤄놓으면 머리 한쪽에 뭉툭하게 남아있어 기억 용량을 잡아먹는다.


이런 번거로운 요인들을 서류 버리기 하나로 없앨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작지만 산뜻한 깨달음이 된다.



또다른 통쾌한 버리기 경험 중 하나가 퓨터 폴더 지우기였다.

나의 회사 컴퓨터에는 15년 이상 된 묵은 폴더들이 일련번호를 달고 나란히 담겨있다. 그 중에는 십여 년간 한 번도 다시 열리지 않은 파일들 많았다.


은근히 애지중지했던 것들 중 주간보고 파일이 있었다. 수년간  매주 작성했던 주간보고 파일은 '날짜-팀명-주간보고'라는 이름을 조로록 달고 있어 보기에도 예쁘게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난주의 주간보고 파일도 다시 열어본 일은 거의 없다. 연말 성과 정리 시에 한 번씩 볼 때가 있긴 한데 그것도 그해가 지나고 나면 볼일이 없다.


그러니까 딱 그해의 파일만 보관해 두면 될 일이었다.

그걸 깨달은 날 수년간 모아놓은 주간보고 폴더를 지웠다. 육중한 무게로 컴퓨터 한구석을 버티고 있던 폴더는 지워지는 시간도 한참 걸렸다. 록바가 천천히 채워지며 100%에 달했을 때 어찌나 개운하던지.


이어서 지울 폴더들을 찾아서 한참 폴더 청소를 했다.

오래전 동호회 회비관리를 했던 파일, 수년 전 워크숍 준비 중 작성한 중간 파일들, 실험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계산용으로 만들어 둔 엑셀 파일들.

이런 것들이 지워지는 것을 보며 노폐물을 짜내듯 쾌감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정리 정돈에 대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물건은 없는 것과 같다.'


5년 전 이사를 할 때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물건을 엄청나게 찾아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인데 잊고 살았어도 아무 문제 없었다면 필요 없는 물건인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 몰라서 못쓴 것이니 집에 없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깨달음을 얻고 이사올 때 대부분의 물건을 처분했다. 내 손에 닿고 어디에 있는지 훤히 볼 수 있게 정리를 마쳤었다.


그리고 5년간 물건은 또 조금씩 쌓여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차츰 늘어가고 있다.


한 번쯤 정리가 필요하다. 창고 안에 두 겹이상 쌓인 물건을 없애고, 아꼈지만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과감히 처분해야겠다.


가장 먼저 언젠가는 다시 신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굽 높은 신발들을 재활용함에 버릴 것.

언젠가는 살이 빠져서 다시 입을 수 있을 거라고 계획하고 있는 옷들에게 안녕을 고할 것.

살 빠지면 다시  입는 즐거움을 나에게 선물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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